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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햄버거에 대한 명상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 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 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 컵/ 소금 2 작은 술/ 후춧가루 ¼작은 술/ 상추 4 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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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 있는 친구에게 놀러갔다가 아주 먹음직한 햄버거를 대접받았다. 이태원에는 자기만의 레시피를 가진 꽤 많은 수제 햄버거집들이 경쟁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몇 년 전부터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참깨가 듬뿍 뿌려진 둥근 번 아래 신선한 토마토와 구운 양파와 녹인 체다 치즈가 살짝 흘러내리고, 바삭한 베이컨과 큼지막한 패티 두 장이 밖으로 삐져나와 식욕을 자극했다. 이 ‘맛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음식을 맛보기 전에, 잠시 눈을 감고 냄새를 음미한다. 바삭하게 구운 고기와 싱그러운 토마토의 저항할 수 없는 향이 코를 통해 뇌를 채우고 나면, 손으로 살짝 햄버거를 눌러 먹기 좋은 크기로 만들고 크게 한 입 베어 먹는다. “이런 게 진짜 햄버거지.”라고 황홀하게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내가 잠시 동안 환상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그건 ‘진짜’ 햄버거가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햄버거는 본디 태생이 비천했다. 집에서 직접 만든 요리처럼 ‘전통적이고’, 푸근하고, 풍성하고 고급스러운 햄버거의 유행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몽고의 타타르식 스테이크니,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유래됐다느니, 19세기 말 세인트루이스의 한 박람회장에서 처음 대중들에게 팔렸다느니 하는 전설은 모두 그 출처가 의심스러운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런 전설에 따르더라도 그 전설에 나오는 음식들은 둥근 지붕을 가진 햄버거 번이 아닌, 얇게 잘라낸 빵에 갈아서 구운 고기를 끼운 샌드위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현상으로서 주목할 만한 대중적인 음식도 아니었다. 그 전설상의 기원들은 햄버거가 아니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진짜 햄버거’는 1920년대, 튀김 요리사였던 월터 앤더슨이 레시피를 정비하고 부동산 중개인이었던 빌리 잉그램이 체인시스템을 만든 ‘화이트캐슬’ 드라이브인 레스토랑에서 시작되었다. 비용절감과 조리 효율을 위해 패티는 거의 과자처럼 얇았고, 둥근 지붕을 가진 번은 정사각형의 테두리를 가졌다. ‘슬라이더(Slider)'라는 이름을 가진 이 햄버거는 식사용이라기보다는 다과용 간식에 가까웠다. 미국의 최하층 노동자계급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이 신개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미국 중서부에서 체인을 조금씩 확장해 나갔다. 이렇듯 햄버거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가격적 소구력을 가진 가볍고 소박한 대량생산품으로서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후(戰後)인 1946년, 대자본으로 넓은 목초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소떼들을 방목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미국의 쇠고기 메이저 회사들은 로비를 통해, 햄버거에는 100% 쇠고기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주로 영세한 농부들에 의해 소규모로 사육되던 돼지고기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로서의 지위를 내주고 결국 닭고기에도 밀리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햄버거는 어떤 다른 고기도 아닌 100% 쇠고기로 만든 제품에만 붙일 수 있는, 미국 쇠고기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화이트캐슬 이후, 햄버거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맥도널드’를 세운 모리스와 리처드 맥도널드 형제와 레이 크록이었다. 맥도널드 형제는 햄버거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거의 예술적인 경지까지 끌어올려서,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자동차 조립라인처럼 변모시켰다. 이 시스템을 보고 미래의 모습을 발견한 레이 크록은 재정전문가인 해리 손느본을 영입하여 부동산 사업을 기반으로 한 프랜차이즈 모델을 만들어 미국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맥도널드는 햄버거 회사가 아니라 부동산회사에 가까웠다. 지금은 맥도널드가 게걸스러운 대자본의 탐욕을 상징하는 상표가 되었지만 이 프랜차이즈 모델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본사는 먼저 부동산을 임대한 후, 프랜차이즈에 가입한 점주들에게 40%의 이윤을 붙여 재임대한다. 대신 본사의 구매력으로 식품 원자재를 값싸게 구입해 이윤을 붙이지 않고 점주들에게 납품한다. 점주들이 사업에 성공해 이윤이 늘면, 그 비율만큼 부동산 임대료도 높인다. 영세한 점주들은 초기 투자비용이 적고, 이윤이 늘면 본사도 수익이 상승하는 구조다. 이렇게 본사와 점주들이 상생할 수 있고, 부동산 계약을 통하여 본사가 점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프렌차이즈 모델들이 실패한 엄격한 품질관리 가능했다. 맥도널드의 햄버거는 단순한 거대자본과 제국주의의 탐욕을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자발적으로 통제에 따르도록 유도하는, 고도로 세련된 산업화와 금융기법, 그리고 자율적 메니지먼트의 결정체였다. 이러한 이유로 맥도널드는 전 세계에서 어떤 유의미한 저항도 없이 극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햄버거를 단지 미국의 천박한 문화적 상징이나 사고력이 결여된 몰개성한 대중의 기호품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햄버거는 과학이다. 컴퓨터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힘의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부드럽게 과시하는 상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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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장정일의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어보면 이 시가 미국의 상징으로서의 햄버거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햄버거가 쇠고기 이외의 고기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미국의 상징으로서의 햄버거인 프랜차이즈 햄버거는 국지적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팔리는 빅맥은 뉴욕에서 팔리는 빅맥과 동일해야 한다. 미리 세밀하게 정해진 작업 지시서에 맞춰 가장 단순한 노동으로 분절된 작업들의 총 합이다.(다시 한 번 컴퓨터와 햄버거의 유사성이 떠오른다.) 때문에 ‘소고기 150g과 돼지고기 100g을 곱게 다진’ 패티와, ‘엇비슷하게’ 썬 오이와, ‘깨끗이 씻’은 상추 따위의 재료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더군다나 빵이 수분을 빠르게 흡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르는 마요네즈와 버터를 같이 ‘약간씩 스며들도록’ 바르는 것은 비용을 절감시키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햄버거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이런 명상을 진지하게 옮조리며 햄버거가 상징하는 것들을 야유하는 장정일의 모습은 흡사, 뉴기니의 화물신앙 의식을 보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미국의 상징으로서의 햄버거는 명상 따위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드는 소일거리가 아니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참하는 군인의 전투식량에 가깝다. 다시 한 번 컴퓨터와 햄버거를 비교하자면, 맥도널드의 레이 크록과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이 둘에게는 기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무자비하고 탐욕스럽게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그런 승리를 통해 얻은 이윤으로 생활의 안락을 누리거나 부를 상속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은 거의 청교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검소하고, 둘 다 거의 모든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기부했거나 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레이 크록은 맥도널드가 한참 성공가도를 달며 확장해나갈 때도 수입이 성공적인 점주들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게이츠와 크록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 기묘한 불일치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 많다. 장정일이 햄버거를 통해 햄버거의 함의를 고발하려 했다면, 이 지점까지 나아갔어야 마땅했다. 그보다 몇 년 전, 일본의 작가인 하루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매력적인 단편, ‘빵가게 재습격’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경직성과 상상력 부족을 고발하려 했던 그는 당시 유행이 끝나가던 미국 베이비붐 세대의 신좌파적 시각에 가볍게 편승함으로써, 진실의 절반을 놓쳤다. 그 소소한 일탈마저도 시스템 개선의 일부로 수용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강력한 힘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구성원 절대 다수가 각자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자유로운 합의에서 나오는 순응, 이것을 단지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해석해서는 절대 우리가 사는 이 전세계적인 맥도널드 시스템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 “바나나 공화국”의 한 장면은 인상 깊다. 미제의 노골적인 식민화와 경제적 침략에 신음하는 남미의 가상공화국의 혁명을 지도하러 간 주인공은 식량조달 투쟁을 위해 현지 햄버거 체인을 턴다. 이야말로 낭만적 혁명과 같은 일탈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기반 없이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유기농 산업, 도시농업 운동, 공정무역, 수제품 과 같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하는 노력들이야말로, 이 효율적인 자본의 단단한 기반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놓친다. 그러나 맥도널드의 한국 1호점이 들어오기 1년전, 젊은 시인이 직감으로 내놓은 결과물에 대해 너는 왜 이런 것도 몰랐냐고 30년이 더 지난 후에 따져 묻는다는 것은 너무 유치한 일이다. 오히려 이 시가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나는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당시 막 해안에 도달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해 무지함과 촌스러움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주변성을 드러냈다고 믿는다. 이는 커피를 미국의 똥물이라며 폄하했던 황지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이 힘의 무서움과 어두운 면을 제대로 깨닫기 까지는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IMF이후, 우리는 그야말로 자발적 의지에 의해 이 시스템을 가장 선진적으로 굴리는 중심으로 진입해있다. 베어 문 햄버거의 향미가 입안 가득히 퍼지면서, 나는 이 환상적인 맛이 한 때 타락했던 개성 없는 프랜차이즈 햄버거에 대한 회복이나 슬로푸드의 소소한 승리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과학적인 자본주의 산업이 이룩한 극도로 효율적인 생산성이 떠받치고 있는 좁은 뗏목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한다. 이 욕망의 바다에서 생산성이라는 염분이 빠져 부양력이 사라지고 뗏목이 가라앉으면, 정성스럽게 만든 햄버거가 주는 이 감동적인 맛도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새삼스레 가볍게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그 뿐, 이 깊은 풍미에서 느껴지는 사육되고 대량으로 도살되는 동물의 고통 같은 문제는 잠깐 머리에 스치다가 금새 사그라든다. 이 오묘한 햄버거의 맛 사이에서.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칼럼니스트 이노원 👉 문화, 취향, 생활에 닿아 있는 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글을 쓰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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