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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까마 레트로 라이프

시계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있다. 흔히 ‘나까마(なかま)’라고 불리는 사람들, 우리 사이에선 도매업자를 뜻한다. 그러니깐 상인-도매업자의 관계에서 둘은 서로에게 나까마인 것이지만, 편평한 장사꾼들을 업자라고 하듯 나까마도 그냥 업자라고 이해되곤 한다. 시계 업계에서 나까마는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물건을 옮겨주는 사람을 뜻한다.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시계를 옮겨주는 가장 일차원적인 노드(node). 가게별로 보유한 시계 모델의 재고가 많다면 나까마는 그 재고를 도매가격으로 받아 필요한 다른 가계에 제공하고 얼마간의 거간비(수수료)를 받는다.

나까마는 많은 상인과 친분을 쌓아야 하고 어디서 누가 어떤 모델을 구하는지 상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또한 좋은 시계를 볼 수 있는 감식안이 있어야 하고 하자가 있더라도 그것을 비용으로 차감하고 나서 원가보다는 높게 넘길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나까마 일반론이라면 일본어 원래의 뜻 ‘동료(同僚)’라는 의미에서 좀 더 살펴보자. 우선, 나까마는 수수료가 아니라 신용을 먹고사는 업자다.

이를테면 그는 이 가게에서 산 시계로 이문이 많이 남을 경우에 다음 거래를 통해 그 이윤을 보상한다. 하자가 있어 판매가 여의치 않은 물건을 받더라도 저번에 많이 남겼다면 그것을 품어주는 것, 그렇게 또 다음 거래를 내다보는 것, 나까마는 그런 역할을 한다. 또한 나까마들끼리 이러한 거래가 이어지기도 한다. 시계 상인들이 나까마에게 많은 부분 기대는 이유는 이런 동료 의식 때문이다. 평범한 손님들이 재고를 다 사가는 경우는 극히 없거나 드물기 때문에 나까마에게 부탁해 애들 등록금이나 경조사 비용을 그때그때 조달하곤 했던 것이다.



한편 나까마에게는 ‘선수’라는 이중적인 의미도 있다. 중고 시계란 기본적으로 지하경제의 일부로 현금이 오고가기 때문에 이런 거래에서 선수란 실력이 좋은 나까마를 지칭하는데, ‘악성 재고들을 눈탱이 치는 실력이 대단하다’, 뭐 이런 뉘앙스가 강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수는 한때 잘나갔던 압구정 중고 명품 가게를 돌면서 높은 소매가에 팔리는 품목들을 싼 가격에 구매해 리세일, 즉 되팔이하곤 했다. 한편 그 선수들은 정교한 퀄리티로 가품을 제작해 부자들에게 속여 팔았다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시계란 본질적으로 사치품이고, 사치품이란 허영을 먹고 사는 재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기도 하다.

70~80년대 경제성장으로 많은 중산층들이 탄생하고 일부는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던 시절, 그들은 남들이 홍콩 면세점에서 금딱지 롤렉스를 살 때, 국내에서 잘 만든 텐포인트(시계 12개의 인덱스 중에 12시 방향 롤렉스 로고와 3시의 날짜 창을 제외한 인덱스 10개가 다이아몬드로 세팅된 롤렉스 다이얼과 그 시계를 ‘텐포인트’라고 부른다. 오리지널과 애프터마켓(커스텀) 세팅이 있지만, 다이아몬드 등급에 따라 금액은 천차만별이다)를 구해 자랑했던 것이다. 

이런 그들만의 세계와도 나까마는 관련이 있다. 황학동 벼룩시장, 청계천 같은 데서 친분을 쌓은 중고업자들에게서 물건을 공급받을 때도 많은데, 도품이나 유실물일 가능성이 농후한 이런 물건들의 경우, 일반 거래가에 비춰 너무 싼 물건을 위험을 안고 사는 경우와(물론 얼마 후 경찰조사는 필연적),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거래를 하지 않는 경우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나까마는 고도로 숙련된 가격 설정자로서 맨 처음 마주치는 시계의 가격을 점지하며 동시에 마치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처럼 극적이며 시적인 그날그날의 운명을 부여받는다. 김 첨지가 사 온 설렁탕을 먹지 못하고 죽은 아내처럼, 그 시계가 끝에 가서는 둔중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별 볼 일 없는 가치로 전락할지라도 그는 미처 실현되지 않는 이익을 역사의 가벼운 전주곡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배척당하고 사기치고 사기당하는 숱한 거래들로 익힌 사물에 대한 감각과 경험들. 주머니 속에는 헌 시곗줄이, 크기가 다른 스프링 핀과 광약이 묻은 안경 닦는 천, 손잡이가 닳은 황동 드라이버가 들어 있고, 특별히 비닐봉지 안에 담긴 시계 부품들은 또 누군가의 손에서 그 광휘를 발휘할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얽힌 채 내일을 기다린다. 오늘도 골목 한 귀퉁이에 서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하다가도 또 그때 돈 좀 만졌던 시계 생각에 들떠서, ‘그런 것만 마주친다면 하루가, 지하철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가 조금은 환해지지 않을까?’, 뒷굽이 닳은 신발을 끌며 혼자 황홀해하며 하루를 끝맺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인(?) 나까마들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동료 중 몇은 나이 들어 죽거나, 지병이 악화되어 사라지거나, 돈 몇 푼을 갚지 못해 신용의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저버렸다. 시계 시장에 들어와서 알게 된 나까마들 중에 지금 같은 하늘 아래 있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세상에 꼭 필요한(?) 이 직업이 멸종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들의 직업윤리는 여타 직업이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나까마를 움직이게 하는 내부적인 동력들——나에게 재미를 주는 시계의 존재 여부와 그것을 입수하고 판매할 수 있는지 등——은 많은 부분 대체되거나 사라져버렸다. 멸종동물처럼 도태되고, 새로운 종과 새로운 시장에 그 장소와 위엄을 빼앗겼다.


남승민 작가


👉 빈티지 사물 판매 요원. 시계로 나까마 이력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삼청동에서 레트로샵을 운영한다. 레트로샵 운영 경험을 모아 최근 <디스 레트로 라이프>는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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