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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느낌인지 RGRG

회사에 사흘 휴가를 내고 뚜벅이 경주 여행에 나섰다. 지금 쉬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은 피로감이 쌓인 것도 있었다. 경주에 도착해 실컷 먹부림을 하고 숙소에 누워 하루를 보냈다. 이틀째 되는 날. 석굴암행(行)을 결정했다. 든든히 밥을 먹고,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파란 하늘이 참 높고 맑았다. 에라 모르겠다, 호사를 부려보자. 택시를 불렀다. 기술의 힘은 참 놀라운 것이,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택시 한 대가 눈앞에 턱하니 도착했다.


기왕 호사를 부리는 김(?)에 드라이브 기운을 내려 창문을 내렸다. 멀찌감치 부드러운 곡선 모양을 한 능들이 스쳐 지나갔다. 시원한 바람, 가을 단풍으로 물든 경주의 풍경을 즐기려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와요! 와그러는교. 아, 예예. 지금 손님이 있어서예, 오후 3시까지 좀 기다려봐주이소.”


전화를 끊은 운전기사의 눈이 백미러에 비쳤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이다. 앞 좌석에서 뭔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담배였다. 사연은 이랬다. 앞서 탄 손님의 전화였는데, 담배를 놓고 내렸으니 돌려받을 수 있겠냐는 문의 전화를 했단다. 운행 중이니 좀 기다리라고 이미 말을 했는데, 젊은 손님은 급했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은 재촉 전화에 마음이 상한 듯했다. 운행 중이냐 아니냐를 먼저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담배를 언제쯤 돌려받을 수 있겠느냐고 한 손님의 말이 서운했던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스마트폰이나 지갑도 아닌 담배 한 갑이니 그리 생각할 법도 했다.


기사님이 짜낸 협상안은 '회사'였다. 토함산 석굴암 입구에 나를 내려놓고, 다시 택시 회사로 돌아가면 얼추 오후 3시니 회사에 담배를 맡겨놓을 요량이라고 했다. 부러 회사까지 가지 않고 적당한 파출소에 맡길 수도 있지만 ‘담배 한 갑’을 파출소에 맡겨 놓는 것도 우습지 않냐는 얘기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했다. 사실 파출소에 습득한 물건을 맡기고 찾는 방법은 생각보다 조금 복잡하다. 서류 작업이 필요해서다. 찾을 때도 본인 확인을 거치고 수령 사인을 해야 하다 보니, 할아버지 기사님 생각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과한 행동'같았던 모양이다.


담배 한 갑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석굴암 입구에 도착했다. 택시 요금은 3만 원을 넘겨있었다. 드라이브 기분을 내려 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색 물건 분실 이야기를 듣다 석굴암에 닿으니 기분이 묘했다.

‘사자에게 나를 먹이세요’


석굴암을 휘휘 돌아보고, 버스를 타고 불국사를 찾아갔다. 해질녁까지 불국사를 거닐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할아버지 기사님 생각이 났다. 그 청년은 담배를 찾았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오후 3시까지 제시간에 회사에 닿지 못하면 담배 한 갑이 얼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금액으로 쳐서 5000원을 내주라고 해야겠다”는 할아버지 기사님은 어찌했을까.


할아버지 기사님 버전으로야 ‘생업’을 배려 않는 손님이 야속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손님 시선으로 보면 또 어떠려나. 만약 그 청년에게 담배 한 갑이 '의미 있는 것'이었다면 말이다. 가능성을 점치기 매우 어렵지만, 첫사랑에게 받은 선물(?)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친구가 입영열차라도 타며 건네준 것이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회사 일을 잠시 보러 노트북을 열어 기사를 읽다가 눈에 들어온 옛 기사를 하나 찾아냈다. 제목은 '사자에게 나를 먹이세요.' 1966년 1월29일자 신문 기사 원문이다.


『동물원의 사자에게 나의 시체를 먹여주세요. 장례식 치를 돈도 없고, 나라의 비용으로 매장하기엔 국비의 낭비 같아서…』 이런 편지가 「샌프란시스코」 동물원 원장에게 왔다. 궁여지책이겠지만, 이 남자의 문맥이나 필적도 괜찮고 하여 별로 정신 이상인 것 같지도 않았다. 얼마 동안 생각한 원장,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당신의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 동물원의 사자들은 말고기만 상식하며, 그 밖의 고기는 일체 먹지를 않습니다』


억지라 타박할 분도 있겠지만, 기사를 읽다 무릎을 쳤다.(독자님들에겐 미리 양해를 구한다.) 할아버지 기사님과 청년에게 필요한 건 이런 '느낌'의 솔루션이 아녔을까. 의미 있는 물건이었다면 제대로 이야기를 해서 수고로움, 기다림을 이겨내고 돌려받으면 될 일이니 말이다. 할아버지 기사님 역시 마음 상하기보다 ‘아, 그렇군. 손님에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무조건 빨리 돌려드려야지요.’ 했을 수도 있잖은가. 그러나 저러나, 그 담배는 어떻게 됐을까. 청년은 잘 찾아갔을라나. 진짜 사연은 뭐였을라나. 경주 여행 두 번째 밤이 이렇게 저문다.



👉 김똑같

퐁당이 시작할 때부터 지금껏 가늘고 길게 연을 맺고 있다.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일간지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최근엔 부모 독자를 대상으로 한 뉴스, ‘헬로! 페어런츠’를 만들고 있다. 퐁당 이름처럼 딱 맞는 필명을 갖고 싶어했다. 최근 심리검사를 해보면서 '고지식함' 수치가 높게 나오는 걸 보고 역시 이 필명이 제격이구나 깨달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우리 모두 평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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