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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스우파

일찍 결혼한 친구 중 한 명은 이미 초등학교 1학년을 둔 학부모다. 요즘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딸의 학교 하굣길이라고 했다. 딸 아이를 기다리며 ‘어떻게 하면 다른 학부모들 눈에 띄지 않고, 부딪히지 않은 채 딸을 신속하게 집으로 데려오는가’가 자신에게 내린 미션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 하교를 기다리는 부모들과 잠깐이지만 의미 없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친목을 위해 ‘하하호호’해야 하는 상황이 그 어떤 스트레스보다 강력하다고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녀가 터득한 방법은 ‘쎈캐’ 음악 듣기. 일단 음악은 힙합 음악이어야 하는데 귀에 내리꽂히는 비트와 발걸음을 같이하면 다른 학부모들이 서 있는 정문까지 세상 가장 센 느낌으로 거닐 수 있는 자신감이 차오른다고 했다. 또한 에어팟 덕분에 사람들이 말도 걸지 않아 오로지 그 음악에 취해 있으면 된다는 팁까지 알려줬다. 제시의 Gucci, 머쉬배놈 vvip, 태민의 advice 등이 아주 효과적이며, 이거 받고 멜로디는 솜사탕인데 가사가 마라 맛인 도자 캣(Doja Cat) 노래들이 리스트에 더해졌다.

그렇게 이 노래들을 그녀와 함께 연달아 돌려 들으며 잠깐이나마 세상의 중심이 나 인양, 저세상 힙을 지닌 양 갸륵갸륵 거린 후 며칠 뒤, 운 좋게 에어팟을 사게 됐다. 뭐에 홀린 듯이 구매를 결정했는데, 아무래도 추천 쎈캐 노래를 들었던 게 무척 인상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얼마나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지 홀로 기뻐하며 드디어 나도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웅장해지는 이야기.


사실 영국에 있는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노래를 듣지 않았던 터라 이렇게 본격적으로(?) 오고 가며 노래를 듣는 게 무척 오랜만이다. 학교 버스에서 들리는, 젊은 친구들(대학교 1~2학년)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듣는 게 음악 듣는 거 보다 더 재미있어서 그때부터 이어폰을 끼지 않은지 꽤 됐다. 마음의 스피커를 켜고 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알맹이 없는 대화를 수집하는 재미가 있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및 해외를 막론하고 여행할 때는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 나의 습관이기도 하다. 갬성충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 역시 보이지 않는 풍경이라고 생각해 하나라도 그곳을 더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어폰을 끼는 행위는 내 현실과의 단절을 알리는 도구이기도 하니깐. 실제로 일할 때 방해받고 싶지 않아 일부러 노래 듣는 척 이어폰을 착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출근길에 이어폰을 놓고 왔다는 걸 아는 순간 착잡함, 분노,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도 그 때문일 거고. 사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쩌면 듣지 않/못한다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데, 이어폰은 이 모든 걸 충족시켜 주며 일종의 룰을 지켜주는 중요한 장치가 되어준다. 세상의 단절을 바라는 이들의 해리포터 지팡이 같은, 뭐 그런 거.


세상과의 단절까지 바랐던 건 아니지만 새로 산 아이팟의 능력은 단절 그 이상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며 현재까진 만족스럽다. 역에서 내려 먹자골목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 족발집을 시작으로 노가리집, 횟집, 갈비집까지 거쳐야 하는 일직선 코스가 있다. 그나마 코로나 시대라 그런지 몇 안 되는 휘청거리는 사람과 약간의 왁자지껄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때 센캐 노래들과 함께라면 소시민 자아에서 스우파 자아로 거듭나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데, 이러한 내적 변화는 애석하게도 나 혼자만이 알아차릴 수 있다.


그간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곤 했던 이곳을 (마스크로 티도 안 나지만) 더욱 정색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어 다니는데, 이때는 주로 우리 원조 쎈캐 언니 비욘세와 브리트니의 앨범 <Lemonade>와 <Britney>가 더욱 흥이 난다. 언니들의 웅장한 기운에 둘러싸여 마치 먹자골목 VIP인 것처럼 보도블록을 붉은 카페트 삼아 집에 들어오곤 하는데, 이때 에어팟을 빼면 잠깐의 스우파 자아는 막을 내린다.


앞서 제시의 Gucci 및 도자캣을 추천해줬던 친구들과 말 나온 김에 다음 번에는 스우파 착장을 하고 만나자는 약속했다. 일 년에 한 번은 콘셉트를 잡아 만나곤 하는데, 내가 제안한 한사랑산악회st.는 대차게 까이고 스우파로 당첨됐다.


다들 마음 속에 스우파 하나쯤은 있지 않냐?

인생에서 한 번도 쎈캐로 살아본 적 없는, 가만히 있다가 늘 가마니 취급당했던 우리가 세상에 던지는 도전장이라며 셋이 각자 스우파 옷차림으로 만나기로 했다. 일단 나는 2006년 그 시절 주야장천 입고 다니던 카고바지를 입기로 확정되었고, 모이기 전 쎈캐 플레이리스트를 취합하여 풀 리스트업하기로 했다. 이 웅장한 기운 잃어버리면 큰일 나니까 에어팟은 절대 빼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 에디터 양열매 독립잡지 라인 매거진 전 발행인.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에디터.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오는 월요일 화이자 2차 접종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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