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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최종 수정일: 2021년 5월 10일

레이먼드 카버라는 미국 작가 단편집 <대성당>(김연수 역)을 읽은 건 수년 전이다. 십여 년 전 한 드라마 피디가 권해서다.


당시 일간지 문화부에서 일하던 나는 ‘여자 드라마 피디, 그들이 사는 세상’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지상파 드라마 피디 중 여자가 흔하지 않았던 때라 그들이 울고 웃는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엄중한 직업의 세계에서 이 ‘여자’라는 한계와 구분이 마뜩지 않을 텐데 섭외에 응해준 분들이 있어 기사는 무사히 출고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기획의 첫 모티브가 되어준 그는 섭외를 거절했는데, 안면도 없는 사이에 전화로 갈음해도 될 일이었지만 커피숍으로 직접 나와 주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다 벌어진 일들, 이태원 곳곳 저렴하면서도 이국적인 싱글 하우스 등 일상의 수다를 마치고 그는 커피값을 계산하고 자리를 떴다.


한창 일에 치여 있었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을 몽땅 지면 안에 활자로 갈아 넣고 있을 때라 목적이 성사되지 않은 그녀와의 한담(閑談)에 한동안 멍해 있던 기억이 난다. 어색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본래 알던 사이도 그 후로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던 그를 이렇게 오래 기억하는 건 바로 카버의 책 때문이다. 헤어지는 길에 그는 주목할 만한 작가로 카버를 소개했다. 카버의 단편집은 그 단정한 톤과 삼삼한 플롯,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듯한 칼 같은 진실 때문에 남다른 서늘함을 준다. 그러나 그 서늘함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삶의 온기 또한 이 책은 품고 있다. 마치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그녀와의 짧은 만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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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에 수록된 단편 중 카버의 색을 잘 드러낸 단편 하나를 우연히 박완서 작가의 책에서 다시 발견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이다. 박완서 선생도 이 단편이 좋았던 모양이다. 아마 아들을 잃은 기억 때문이리라. 이 단편의 주인공 앤과 하워드 부부에겐 여덟 살 된 아들, 스코티가 있다. 스코티의 생일 직전 앤은 쇼핑센터에 있는 제과점에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러 가고, 빵집 주인은 전화번호와 아이 이름을 받아 적고는 퉁명스럽다. 스코티의 생일날 아침, 다른 날처럼 걸어서 학교에 가다 인도에 발을 헛디디면서 지나가던 차에 치이는 아이. 비틀거리지만 멀쩡하게 일어난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온 스코티는 앤에게 사고를 당한 이야기를 하고 곧장 소파에 축 늘어지더니 의식을 잃는다. 병원에서도 아이는 긴 잠에 빠져든다. 앤과 하워드 부부는 초조하고 불안한 밤을 맞는다. 의사는 곧 깨어날 거란 말만 반복한다. 부부는 새벽녘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다. 이때 남편 하워드가 주문한 케이크를 왜 안 찾아가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워드는 딴청을 부리고, 장난질을 당했다고 생각한 빵집 주인은 막말을 하고... 하워드는 병원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하지만 아내는 생일 케이크를 주문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다음날 새벽 5시. 이번엔 전화를 받은 앤에게 빵집 주인은 ‘스코티를 잊은 거냐’며 서늘하게 묻는다. 앤은 폭발한다. “이 못된 새끼야!!” 아이는 병원에 온 지 사흘 만에 눈을 떠 엄마 아빠를 보는 듯하더니 영영 숨을 거둔다. 기진맥진 집으로 돌아온 부부. 전화가 걸려온다. 윙윙대는 제빵기계 소리. 앤은 질 나쁜 전화의 주인이 빵장수인 것을 알아차린다. 앤은 남편과 함께 빵집으로 돌진한다. 앤은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며 폭언을 퍼붓고 옥신각신 불통의 고성이 오간 후 빵장수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과하는 빵집 주인은 앤 부부를 의자에 앉히고 오븐에서 갓 구운 따뜻한 롤빵을 내놓는다. 빵장수는 자신에겐 아이가 없고 이른 시간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빵을 굽는 일만 해왔다며 이야기를 나눈다. 앤은 빵을 더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새벽이 오고 햇살이 높이 비칠 때까지. 앤의 부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내일을 살아가게 될지 작가는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인생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울 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는 때, 앤 부부는 낯선 빵장수에게 빵을 대접받는다. 그가 준 빵과 커피가 이상하게도 꾸역꾸역 잘 넘어간다. 접점이 없는 그의 인생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 그가 이웃이나 친구, 가족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인생이라는 무게. 그때서야 나와 나를 둘러싼 불행한 진실을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삶은 이어진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빵과 커피. 그때에는 비록 깨닫지 못하지만, 그것이 삶을 이어지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수년 수십 년이 흐른 후에 알아챌지 모른다. 누군가와 나누는 일상의 밥 한 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거절하지 않을 이유다.

프리랜서 이현정 👉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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