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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쪼다

공부한답시고 영국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한 달이 넘었다라… 사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한국에선 매달 12일 카드 값이 청구된다는 문자를 받고 나서야 한 달의 시간이 흘렀음을 가늠하곤 했는데, 이곳에서의 한 달은 그저 흘러갔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억울할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서두에 남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언제부터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기어코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학생 때, 친한 친구들 몇몇이 교환학생을 준비했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별 생각 없이 토플학원을 다니다 2/3까지 수강하면 환불 불가란 말에 15일 만에 도망치듯 환불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에게 영어공부란 못할 짓이었다. 내 친구들은 교환학생을 다녀왔고 나는 내 의지대로 가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가장 큰 우선순위는 일이었고 나름 열심히, 재밌게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관성적으로 일하는 내 모습을 눈치챘다.


20대 때 연극 하나만 봐도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에 감격하고, 전시 하나에 내 영혼을 채운다는 생각으로 충만하던, 오버 감성을 지녔던 나였는데, 이젠 어느 것 하나 신기한 게 없고 전시나 맛집을 가서도 아주 비평가 납셨다는 비아냥을 들어도 될 만큼 구시렁 구시렁대는 내가 보였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갈 내 모습에 두려움이 엄습하던 찰나, 그때 그 시절 내가 해보지 못했던 해외 생활을 한다면 나아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그 시작이었다. 결국 한 번 해볼까 반신반의했던 마음에 물음표 대신 느낌표로 답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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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짧았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뭐 펀(Fun)한 것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오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는. 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매일 1일 1쪼다를 실천하고 있기에 은장도가 있다면 내 허벅지를 찌르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모든 건 영어 실력이 하찮아서 비롯된 것인데, 얼마나 바보 같은지 남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정도만 말을 하자면 31살의 나이에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아서 한국보다 2살이나 어리게 살고 있다) 교수님과의 아이컨택이 무서워 교수님이 대답할 학생을 찾는 낌새라도 보이면 창문을 응시하거나 교과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일이 잦다. 이래저래 그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빼박 아이컨택이다. 그다음은 발표를 해야 하는 거고. 초등학생 때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없는 눈치코치 다 끌어다 모으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난다.


수업이 끝나면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같은 반 친구들에게 내일 과제가 이게 맞는지 확인하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행위 역시 내가 얼마나 쪼다스러운지를 일깨워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 핸드폰 유심을 사러 갔다가 당최 점원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냥 나갔다가 이런 내가 너무 쪼다스러워서 다시 한번 용기 내어 갔는데, 결국 ‘See You Later’만 외치며 다시 나왔던 이야기. (변명하자면 여기서 사용하는 TOP-ON과 ADD-ON 개념이 이해가 안 됐다. 아, 물론 영어를 잘하면 문제될 게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변명이다) 그러고 나서 유심 사는 게 너무 무서워서 몇 날 며칠 가지 못했다.


결국 다른 유심 매장을 가서 천천히 얘기해달라고 말한 후에야 핸드폰을 개통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펍을 갔는데, 아니 왜 다 여권을 갖고 오는 거야? 몰랐다. 펍을 가기 위해서 여권이 필요하다는 걸. 아니 너희들은 어떻게 다 아는 거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친구들의 벙찐 표정에 애써 담담한 척 ‘금방 다녀올게’를 외치며 펍에서 기숙사까지 왕복 40분의 거리를 걸었다는 다리 아픈 이야기… 물론 너무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는 사례가 이것의 배라는 것만 알아두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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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정신승리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부류, 자기합리화 쩔고 뭐든 세상의 중심은 자기에 맞춰 돌아간다 식으로 생각하는 인간들. 그게 지금의 나다. 정신승리: 본인에게 치욕스럽거나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왜곡하여 정신적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며 실상은 자신의 망상으로만 승리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 매일같이 치욕스럽거나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정신승리 하나로 버텨내는 나에게 뼈 맞는 아픔을 전해주는 정의다. 이를 확인하고 나서 잠깐 마음이 아렸지만 지금 이 순간뿐이다. 아니, 내가 영국에 와서 살아본 적도 없고, 어학연수를 가 본 적도 없는데 이 정도 이렇게 해내는 거면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열매야, 네가 모르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거야. 걱정하지마. 지금 너무나 잘하고 있어. 이런 거, 해보지 못한 거 경험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그럼 다 처음이고 낯선 게 당연한 거야. 어차피 겪어야 할 일, 지금 조금 쪽팔리지만 미리 겪은 게 얼마나 다행이니 안 그래? 라고 되뇌면서. 잠깐의 안도감과 함께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지만 나의 모자람으로 가득한 팩트는 사라지지 않기에, 그 뒷맛은 언제나 씁쓸한 게 정신승리의 단점이라면 단점이겠다. 그 씁쓸함이 느껴질 때마다 떠오르는 게 정신승리의 대표주자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다. 그의 정신승리법을 잠깐 소개하자면 동네사람들한테 벌레 취급을 당하자 자기야말로 ‘자기를 경멸할 수 있는 제일인자’라고 여긴다. 게다가 ‘자기경멸’이란 말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제일인자’ 아닌가, 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정신승리자가 갖춰야 할 기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사람이겠거니 여겼던 아Q에게 연민을 느끼는 꼴이라니. 그의 정신승리법은 나날이 진보하지만 결국 만인이 자신을 외면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보다 더 슬픈 건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만의 승리에 갇혀있었다는 걸 테다. 밤마다 이불킥을 하는 대신 정신승리로 하루하루를 넘긴 지 한 달 째, 괜히 아Q를 떠올린 것 같다. 참으로 기분이 꿀꿀해진다. 오늘도 내 정신건강을 위해 크고 작은 정신승리를 실천해왔는데, 결국 나도 지금 처한 현실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아Q에 지나지 않는 건가, 라는 생각도 잠시, 아까 낮에 슈퍼에서 거스름돈을 덜 받은 게 생각났다. 말할까 했지만 단돈 5펜스였다. 그래,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계산을 했겠어. 실수할 수도 있지. 아, 나란 사람 역시 사려 깊은 사람으로 마무리 지으며 오늘도 자책하는 대신 아득 바득 나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며 안녕~! 


에디터 양열매  👉 독립잡지 <라인>발행인 겸 온오프라인 에디터로 일했다. 지금은 영국에서 디지털 퍼블리싱을 공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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