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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틴

<열여덟의 순간>이란 TV 드라마가 얼마 전 종영했다. 아이돌 출신 배우 옹성우와 아역 출신 배우 김향기가 주인공인 학원물이다. 어설프고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될 거라는 추측대로, 교복 입은 두 배우는 회를 거듭할수록 10대의 순수함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자주 흔들리는 눈빛, 머뭇대는 표정, 끝을 얼버무리는 말투. 그러나 언제나 말로 행동으로,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해”라고 기어이 토해내는 진심.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못하는 아이들의 감정을 주거니 받거니 잘 그려내어, 기억이 흐릿한 어느 지난날의 나 자신을 소환하는 기분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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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안보일 수도 있지만, 옹성우입니다.


물론 지난날의 나는 누군가를 “좋아해!”라고 대놓고 얘기해본 적이 없다. 대신 “사귈래?”라고, ‘무모한 도전’을 한 적이 있다. 이 친구를 내 인생의 첫 남자친구라고 부른다. 사실 그때의 나는 사귄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정작 남자친구 노릇으로 진짜 연애라는 것을 시작한 건 그 친구였다. 꽃다발을 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기,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살아온 이야기 해주기, 카페에선 옆자리에 나란히 앉기, 크리스마스 이브엔 명동 거리에서 장갑을 사주고, 헤어져 돌아가는 길엔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 불러주기. 정말 성실하게 남자친구 역할을 해냈다. 이쯤 되면 드라마 속 ‘수빈’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했겠지만, 현실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흠, 이 녀석, 가죽점퍼를 왜 입고 나왔지? 아빠 걸 빌려 입었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에이, 너 걔 안 좋아했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아니다. 기숙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종일 그 애 생각을 했었다. 그 아이가 “그래, 한번 사귀어 보자”라고 응해준 그 날 아침의 등굣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늦가을 아침 이슬을 잔뜩 머금은 것 같은 가로수 나뭇잎들의 촉촉함, 동쪽 저 끝에서 뿌옇게 피어오르는 것 같은 연노랑 햇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지구를 완벽하게 꽉 채운 어떤 물질 같은 걸 느꼈다. 어제의 후회도 내일의 두려움도 없이 오로지 하루가 그 아이의 존재로 꽉 차는 경험은 처음이었고, 솔직히 그 후로도 그날의 그 완벽한 하루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던 아이. 가지런한 치아로 합창단에서 가장 크게, 가장 멋지게 노래를 부르던 아이. 언제나 서로를 ‘갈구고’, 서로의 이야기를 ‘받아치면서’,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깔깔대느라 초저녁 시작한 전화를 새벽 5시까지 이어가던 그 날의 그 순간들. 삼 개월이 지나, 나는 그 아이에게 헤어지자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간 우리가 한 일이라곤 손을 한 번 잡아본 것, 그리고 늘 깔깔대며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농담을 한 게 전부였다. 용감하게 첫 고백을 한 것치곤, 참 허무하고 싱거운 이별 통보였다. 이유 같은 건 묻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그 친구는 답장을 보내왔다. “널 이해하려 했지만 지금 나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겠다. 널 보면 늘 이 노래가 생각났어. 네 안에 또 다른 너 자신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것이 너를 행복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같아. 네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어.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 친구가 보내준 노래는 조성모의 ‘가시나무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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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이 쉴 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당신이 편할 곳 없네/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내겐 너무 어려운 노래를 보내와서 한참 동안 가사를 음미해야 했다. 사실 그때의 나는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란 사람을, 나의 감정 어느 부분을 짐작하고 느낀다는 게 싫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때의 나는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딱히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정형편은 어려웠고, 오랜 시간 축적된 아버지 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덧나고 있었으며, 대학생으로의 출발은 기쁨이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으로 짓눌려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마음 안에 오래 쌓여 있던 먼지를, 누구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은 적도 딱히 없었다. 그가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이 일생토록 겪는다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대소사를 치르면서 조금씩 지난날의 나를 떠올려보게 된다. 당시의 나는 미숙했을 것이다.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일, 누군가에겐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평온한 얼굴 뒤에 툭툭 튀어나오는 냉소적인 말투, 타인을 배려하는 듯 예의 있고 조금은 무심한 행동 뒤에 타인과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그어버리는 습성. 그때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 열여덟 살의 아이들은 달랐다. 상처와 슬픔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두 아이는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그저 안아 주고 있었다. 첫사랑에 두근거리는 아이들에게도 삶은 퍽퍽하고 서글프다. 바람 핀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그 상처에 몸부림치는 엄마를 둔 수빈이, 어린 시절 너무나 보고 싶었던 아버지를 용기 내어 찾아갔지만 자신의 현재 행복을 위해 “조용히 사라져 달라”며 냉대한 아버지를 둔 준우. 그런 서로를 알아보고 감싸 안는 두 아이의 진실한 마음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고 주제다.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사랑의 본 얼굴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가 살아왔을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매 순간 함께이고 싶은 거란 걸 그때의 나는 몰랐을까. 그런 관심은 호기심에서 애정으로 애정에서 공감과 이해로 넓게 확장될 것이다. ‘너를 더 알고 싶어’, ‘너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싶어’라는 애정의 표시,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받고 또한 줄줄 아는 것. 사랑에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깨닫게 됐다.


‘열여덟의 순간’, 나를 바라보는 너의 마음이 온전히 열려 있었음에도 나는 과연 너에게 진솔하게 열려 있었을까.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00야! 그때의 난 좀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누군가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주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나 스스로 어색하고 자신이 없었지 뭐야. 너의 눈이 내게 향해 있었다면, 나의 눈은 나 자신을, 그리고 이 세상의 아무 의미 없는 눈들을 향해 있었나 봐.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서서, 그 시절의 너와 내가 떠오를 때마다 난 살포시 미소짓게 돼. 우리가 옹성우 같은 매력남도 김향기 같은 귀염둥이도 아니었지만, 그때 우린 정말, 많이 웃었어. 그 시절의 나를 웃게 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이현정 작가


👉 전 한국일보 기자. 지금은 ‘브런치’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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