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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아직 새벽도 되기 전이었고, 밤 하늘에 별이 무수히 많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저 혼자 아름다워서 야속했다. 나는 열일곱 살 언저리였다. 학교는 생각이 나면 가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그날 아버지와 다투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도 그냥 내키는 대로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다. 시간표를 꼼꼼히 체크해서 적절한 인아웃 시간을 선택했다. 특히 영어, 물리, 윤리 선생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한테 아주 관대하셨는데, 그래서 그날은 2교시 영어 시간을 타겟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영어 선생님은 안계시고, 국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이런….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국어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었다.


"김선형이! 지금 오는 거야?"

"지금이 몇 시야? 미쳤냐? 왜 이렇게 늦어?!!”


등등의 고성이 날라왔다. 나는 물론 미치지 않았으므로 국어 선생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영어 시간인 줄 알았습니다.”

나의 대답에 반 친구들의 웃음이 폭발했다. 난리가 났다. 물론 국어 선생님은 아이들이 웃는 이유를 몰라서 더 화가 나신 모양이다. 국어 선생님은 근신인가, 정학인가 아무튼 그런 조처를 취하기 위해 부모님한테 연락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아버지와 다투게 된 이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등교를 게을리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노는 게 좋아서 그랬던 것 같지만, 학교 가는 일이 인생의 낭비 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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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학교에서 경고가 날아오자 아버지도 가만히 계실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학교를 땡땡이 치고 내처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는 도시 외곽 도로에 나를 떨구셨다. 집까지 걸어오라는 것이다. 버스가 다니는 시간도 아니고, 사람도 없었다. 근처에 양계장들이 많아서 닭똥 냄새가 가득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밤 하늘에 별이 무수히 많았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고 있으면 그래도 내가 땅을 딛는 만큼 확실히 앞으로 나아간다. 불안정한 열일곱 살의 마음에 그래도 안정감을 주는 무엇인가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생각도 필요없고,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걸을 때는 그냥 앞으로 팔과 다리를 뻗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아무튼 그때부터 무작정 걷는 습관이 생겼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잡념이 생길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걷는다고 그런 것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없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도, 낼 수 있는 속도도 뚜렷한 한계가 있기에, 뭐랄까 스스로를 몰아부치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몰아부치고 있다가도 다시 자신에게 맞는 속도에 맞춰 돌아오게 된다. 오르막이라고 기어를 바꿔 넣을 수도, 급하다고 엑셀을 밟을 수도 없으므로, 그냥 내가 걸어갈 수 있는 만큼, 내 걸음의 속도에 맞춰서 사는 수밖에. 물론 단점도 있다. 어느 날인가는 몇 번 어떤 여자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날 그만 눈치없이 상대방을 명동에서, 남산으로, 한강으로 끌고 다닌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서울 시내는 거의 걸어서 다니고 있던 터라 상대방을 고려하지 못했다. 만난지 몇 번 되고 나니 긴장이 풀린 것이다. 나중에 한강 근처에 이르러 여자 분이 자신의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나서야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처 약국에서 밴드를 사서 뒷꿈치에 붙여 주고 다음에는 운동화를 신고 만나자고 했지만, 그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니까 걸을 때는 구두보다는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고, 한강에 갈 때는 차로 이동하는 것이 정석이다.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누구든 원하는 사람과 무탈하게 사귈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다 지켰는데도 관계에 진전이 없거나 어긋난다면, 안타깝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것이다. 나도 더 이상 도와줄 수가 없다.

에디터 김선형 👉 온오프라인 콘텐츠를 만들고, 미디어를 운영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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