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게 하는 이야기들
- 퐁당 에디터
- 2019년 11월 8일
- 3분 분량
새로운 환경 속에 나를 던져 새삼스레 이런저런 감각을 되새기는 것을 나는 휴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휴가는 꼭 여름일 필요는 없었기에 초여름부터 으레 듣는 “휴가 다녀오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은 늘 “아니요” 였으나, 그래도 질문을 들으면 ‘휴가가 필요하긴 하지’ 생각하며 언제 짐을 꾸리면 좋을까 때를 가늠해보곤 했다. 그러나 가장 휴가다운 휴가는 늘 급작스레 시작되는데, 가끔은 짐을 꾸리고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 오곤 했기 때문이다. 여름이 다 지나간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휴가 다녀오셨어요?”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올해도 “아니요”. 그런데 그것이 정확한 대답인가 하면 역시 “아니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요 근래 소설과 영화 속에서 참 새삼스레 휴가와 비슷한 감각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 게다가 그 흔적이 그 어떤 휴가보다도 강렬해 매일 틈틈이 하나씩 꺼내 곱씹으며 꽤나 오래 그 여운을 즐기고(?) 있다. 이런 휴가(?)는 처음이라 얼떨떨해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영화 <벌새> 1) 의 주인공 은희는 ‘안면 마비가 올 수도 있는’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비로소 찾아온 관심이 나쁘지 않다. ‘오빠가 때렸다’고 말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아빠가 (뜬금없지만) 엉엉 울었고 엄마는 고기반찬을 밥 위에 얹어 준다. 영화 내내 무표정인 은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오를 때 나는 은희보다 4-5살 정도 어린 내가 서 있던 상가 건물을 떠올렸다.

아빠가 나를 때리면 엄마는 나를 그 상가로 데려가 가지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그 관심이 나쁘지 않았던 기억. 그런데 나는 은희처럼 고기를 받아먹기 보단 좀 더 툴툴대는 애였다. 그러면 ‘너 같은 애 비위 맞춰주기 힘들다’며 엄마는 휙 돌아서 가 버리곤 했다. 홀로 남겨지면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목에 걸린 무언가를 알아서 눌러 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에겐 당장 떠나야 하는 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감정은 알아서 눌려 찌그러졌다.
은희와 비슷한 나이 때 나는 실은 소설 <항구의 사랑> 2) 의 주인공인 준희가 다니는 중학교에 다녔다.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건 아니지만 꼭 같은 학교처럼 묘사된 학교에 다녔다. 은희의 세상을 크게 뒤흔든 성수대교 붕괴 사고 같은 건 지방 소도시에 사는 나에겐 너무나도 먼 세계의 일이었기에 나는 준희처럼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떠나 서울로 가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수능은 또 먼 훗날의 일이기에 팬클럽 활동을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고, 그래서 팬픽을 읽었고, 그래서 어떤 여자애들끼리는 사귄다는 것도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내가 당시 진심을 다해 작성한 교환일기나 목숨처럼 아끼던 수집품은 ‘쓸 데’가 ‘없어’ (나도 모르는 새) 폐기처분 되었고, 그때의 친구들도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다. (실은 연락이 닿지 않길 바라고도 있다) 준희의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 내 기억에서조차 폐기처분 될 뻔한 이야기들이다. 영화 <소공녀> 3) 의 주인공 미소는 ‘쓸데없다’ 여겨지는 담배와 위스키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음, 어떻게 보면 담배와 위스키를 월세방을 포기해서라도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야 살아지는 사람이다. 은희와 준희와 달리 미소는 성인이고 그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지만 (게다가 미소는 어른답게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지지만) 미소의 주변인들은 그런 미소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 여긴다. 형태는 다르지만 나 역시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지키려 애쓰는 것들이 있다. 또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그래서 내가 아끼고 존경하는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엉엉 울었다. 영문은 잘 몰랐지만 그 감정은 쉽게 눌러 찌그러트리지 못했다.
은희와 준희의 이야기는 통해 나는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를 새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은희와 준희는 내가 탈출하고 싶었던 과거에도 ‘담배와 위스키’가 있었음을 환기시켜 준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그러니까 성숙하고 철이 들어 어른의 가치가 담긴 ‘담배와 위스키’를 찾은 것이 아니다. 주변의 모두가 가치없다 폐기처분하고 나 자신도 웃음거리로 삼거나 없던 것으로 여길 뻔한 그때 그 이야기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고, 거기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담배와 위스키’가 있다.
그걸 찾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이들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신의 이야기를 SNS를 통해, 지면을 통해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닮은 이야기가 있었음이 더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갈수록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였다는 것이 새삼 선명해진다. 고백하게 하는 이야기들에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더이상은 나를 휙 버리고 돌아서지 않겠다 다짐하게 하는.
1. 벌새: 2018년 제작된 영화.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2. 항구의 사랑: 소설가 김세희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3. 소공녀: 2017년 전고운 감독이 만든 장편 영화다.
디자이너 신인아
👉 그래픽 디자이너. 오늘의풍경(Scenery of Today)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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