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으면
- 퐁당 에디터
- 2020년 1월 31일
- 3분 분량
J가 오토바이를 탄다고 했을 때 말렸다. 스무 살 때 오토바이 사고로 과 동기를 잃은 적이 있던 터였다. J도 같은 과였으므로 그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열심히 말리지는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인데 본인이 좋다는 걸 어쩌겠나. 오토바이는 위험하니까 타지 말라는 말이 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친구니까 걱정하는 티는 내야겠기에 살살 말렸다. 우리가 아는 이십여 년 전 그 사건을 꺼내며. 요 몇 년 동안 침체기를 겪은 J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죽는 건 안 무서워.” 나 역시 퉁명스레 대꾸했다. “죽을까 봐 그러냐? 반병신 될까 그런다.” 휴대전화 너머로 까무러치게 깔깔거리는 J의 목소리가 전해졌다.“역시 넌 내 친구야!” 콧방귀를 꼈지만 속으로 나도 따라 웃었다. 모처럼 재치를 발휘한 것 같아 기분이 우쭐했다.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그 얘기를 해줬다. 남편이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안 웃었던 것 같다. 그 통화가 있고 얼마 후, J의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강원도로 바이크 라이딩을 떠났다가 인제 어느 국도변에서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던 J는 정말 그렇게 죽어버렸다. 지지난주에 J의 사진전을 겸한 추모전을 사흘 동안 열었다. 어린 시절부터 써온 J의 글과 사진을 엮은 책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사흘 중 가운데 날은 J의 생일이었다. 누군가 잊지 않고 케이크를 준비해 왔고, 사람들은 내게 촛불을 끄라고 했다. 숨이 모아지지 않아 세 번에 걸쳐 큰 초 네 개와 작은 초 두 개를 껐다. 추모전을 준비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다. 책을 만들고 사진전을 준비하는 데 육 개월가량이 걸렸다. 다섯 사람 모두 생업이 따로 있는데다 생각과 취향이 달라 의견을 맞추고 조율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가장 못할 짓은 J의 사진과 이름을 계속해서 봐야 한다는 거였다. 무감각했던 날들이 더 많았지만, J의 얼굴과 이름이 칼이 돼 내 눈을 찌르는 날들도 있었다.
추모전이 끝나면 내 삶에서 J를 좀 털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일만 잘 치르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J의 장례식이 있고 얼마 후 지인과 통화했던 게 생각난다. 지인은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나는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상대방 역시 그래,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하고 내 말을 따라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잠든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밖으로 나와 몇 시간씩 쏘다녔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마신 날이 더 많았다. 술을 마신 날은 울고 마시지 않은 날은 울지 않았다. 추모전이 끝났지만 여전히 자려고 눈을 감으면 J가 생각난다. 생각하지 말자란 생각을 자꾸 하니 더 생각이 난다. 며칠 전 또 그렇게 J가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았다. 밤에 커피를 마셔서인지 그날따라 더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얇은 셀로판지처럼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1시쯤이었다. 신도시가 조성중인 동네는 밤 10시만 돼도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늘 다니던 길과 좀처럼 가보지 못한 길을 걷다 공원 호숫가에 이르렀다. 검은 물을 한참 들여다보는데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친절한 그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보다 등줄기를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J 생각이 한순간 걷어지고, 나는 겁에 질려 그곳을 떠났다. 오그라든 심장은 계속해서 펌프질을 해대고 집은 멀게만 느껴졌다.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모르게 발걸음을 내달렸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불현듯 궁금해졌다. J는 정말 무섭지 않았을까? J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은 그날 그 장소가 다시 떠오른다. 아이와 나는 예전 살던 아파트 인근 공원의 트랙을 돌고 있었다.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쌩쌩 돌았고, 나는 통화를 하며 쉬엄쉬엄 걸었다. 아이가 다섯 바퀴를 도는 동안 나는 한 바퀴도 돌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아이에게 소리쳤다.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제발 천천히 달리라고. 아이는 소리쳐 웃으며 더 쌩쌩 달렸다. 진짜 J는 무섭지 않았을까? J의 동생이 전해준 바에 의하면, 고통조차 느낄 새 없는 빠른 죽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J 또한 끝끝내 알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날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섭다고. 네가 죽을까 봐 너무 무섭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지라도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그러자 까르르 웃어젖히는 J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권은정 작가 👉 소설부터 에세이까지 다양한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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