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꽃다발과 운

내가 호러, 스릴러영화만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해다. 로맨스 영화도 좋아한다. 지난 14일 개봉한 도이 노부히로 감독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도 아주 좋았다. 2015년에서 2020년까지 20대 남녀가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 취향이 같아 사랑에 빠진 남녀는 동거를 시작했지만, 점점 일상의 늪에 빠지면서 멀어진다. 너무나 리얼하고, 너무나 공감이 가는 사랑의 한때. 주연인 아리무라 카스미 때문에 본 것만은 아니지만 그녀의 연기는 깊고, 사랑스러웠다.


지금,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리무라 카스미에 대해서도 아니다. 영화도, 카스미도, 하고 싶은 말이 넘치도록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저, 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리무라 카스미가 연기하는 대학생 키누가 아침을 먹고 있다.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서. 그 위로 나레이션이 깔린다. 하나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토스트를 바닥에 떨어트리면, 반드시 버터 바른쪽이 아래다. 키누가 실수로 토스트를 떨어트린다. 바닥에 떨어진 토스트의 아래쪽에 버터가 발라져 있다.


머피의 법칙 같은 것이다. 평범한 일에도 늘 불운이 따라오는 것. 아니 좋은 운이 잘 오지 않는 것 정도로 하자. 키누는 평범하다.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이 줄지어 따라올 정도로 화려하거나 예쁘지 않다. 영화, 소설, 연극, 만화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즐기지만 직접 창작할 재능은 없다. 좋아하고, 즐길 뿐이다. 남자친구가 된 무기는 그림을 잘 그린다.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따뜻하고, 눈에도 마음에도 잘 들어온다. 키누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열심히 입사 준비를 했지만 다 불합격이었다. 힘들어하는 키누에게 무기는 동거를 제안한다. 무기는 그림을 그리고, 키누는 알바를 시작한다. 키누는 무기의 그림을 좋아하고, 응원한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무기의 그림은 한 컷당 만 원밖에 받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세 컷에 만 원으로 해달라고 한다. 그건 힘들다고 했더니, 일이 끊겼다. 생계를 꾸릴 수 없다고 생각한 무기는 결심을 하고 직장인이 되기로 한다. 겨우겨우 들어간 회사에서 영업직을 한다. 출장과 회식이 많고, 거래처에 잘 보이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일이다. 키누도 취업을 위해 회계 자격증을 따서 병원에 취직한다. 키누의 운은 그 정도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회사에 취업도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림을 포기했다. 좋은 기회가 계속 생기고, 부모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고,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는 일 따위는 없다. 아마 키누는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나는 평범해. 그러니까 더욱 좋아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나는 운이 없다. 사주에서도 횡재수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모임이나 행사에서 추첨을 하면 언제나 참가상 정도였다. 가챠 뽑기를 하면 늘 평범한 것만 걸린다. 그리고 나는 평범하다. 특출난 재능 같은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보통에, 운도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렇다면 좋은 운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자. 생활이건 경력이건 운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루틴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하자. 크게 성공을 거두거나, 돈을 왕창 벌거나 그런 것이 없어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길로 갔다. 들어오는 일은 다 하고, 마감은 반드시 지키고,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계속 지켜보았다. 가끔은 좋은 운이 온다. 기회가 온다. 아무리 박복한 인생이어도 3, 4번의 기회는 찾아온다고 믿는다. 그때 기회를 날려버리는 짓만 하지 말자. 어떤 기회가 와도 잡아챌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서, 쉼 없이 달리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운 없는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패로 끝난 일도, 몇 년간 즐거웠고 배운 것이 많았다. 그 정도면 좋은 운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내가 도망치거나 운을 내팽개치지 않았으니까. 병원 회계 일을 하면서도, 키누는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는다. 소설과 만화를 보고, 연극과 공연을 찾아간다.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경험하고, 확장한다. 그러다 우연히 이벤트 회사를 하는 선배를 만난다. 월급이 좀 적어져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키누는 전직한다. 토스트를 떨어트려 버터가 바닥에 닿아도, 바닥이 깨끗하면 좀 털어서 먹을 수 있다. 찝찝해도 그게 내 운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면 가능하다. 작은 운을 가지고, 내가 적당히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되는 것이니까. 내 인생의 미미하지만 즐거운 시스템. 좋은 운이 오면 좋지. 아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오지 않아도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소소한 일상에 만족할 테니까.



👉 칼럼니스트 김봉석

글 쓰는 일이 좋아 기자가 되었다.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를 만들었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소설, 만화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 15년 이상의 직장 생활, 7, 8년의 프리랜서를 경험하며 각양각색의 인간과 상황을 겪었다.




Comments


ⓒ 2017. function all right reserved.

  • Facebook
  • Instagra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