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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의 계절

철 지난 낚시 얘기를 해볼까 한다.


8년 전, 서울에서 살 때다. 잠투정 심한 아이를 겨우 재우고 한숨 돌리는데 전화가 왔다. 종로경찰서 무슨무슨 수사팀 아무개 형사란다. (다들 이쯤에서 눈치 챘겠지. 전화 받은 시점이 8년 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주길.)


경찰서에서 무슨 일이지? 딱히 집히는 데가 없다. 옥탑방에 세 들어 살 때 형사들이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건 전 세입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설마 아직도 김병철 씨의 행방을 내게 묻지는 않겠지.) 예전에 일하던 사무실이 털려 현금 20만 원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데 이제야 범인을 잡았나? (이 사건을 담당한 곳이 종로경찰서였다.) 하지만 좀도둑 잡는 데 몇 년을 허비할 만큼 우리나라 형사 인력이 남아돌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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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국제금융사기에 연루된 정황이 포착돼 전화했단다. 명의를 도용당했을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지금이야 흔해빠진 고리짝 수법이지만 이때만 해도 따끈따끈한 신상 피싱이었다.) 순간, 예전에 카드사에서 연락 받은 일이 떠올랐다. 신용카드 해외 도용 건 때문이었는데 하필이면 아침 7시에 전화를 받았다. 카드사 직원이 이 시간에 일을 한다고? 당연히 내 반응은 이랬다. 보이스피싱이군. 이런 쓸모없이 부지런한 낚시꾼을 보았나! 나는 시종일관 비협조적인 태도로 딴죽을 걸었다.


피곤한 목소리의 남자는 슬쩍슬쩍 불쾌감을 내비치면서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지금 계신 곳이 어딘지. 새벽 1시에 땡땡주점에서 카드 결제를 하셨는지. 음. 내 카드 사용 내역까지 꿰뚫다니 보이스피싱이 무섭긴 하구나. 그런데 이런 말을 한다. 새벽 3시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결제 시도가 있었다고.


한도 초과로 승인이 거부되었다고. 응? 내가 밀라노에서 카드 결제를? 자는 동안 유체이탈이라도 했단 말인가? 술도 잠도 덜 깬 채 여전히 멍멍거리는 내게 남자가 조곤조곤 설명해줬다. 해외 도용 피해를 막기 위해 24시간 모니터링을 가동하던 중 내 카드에서 이상 결제를 감지했다고. 오전 1시에 서울에서 결제를 했는데 2시간 후 밀라노에서 결제라니. 내가 무슨 축지법을 쓰는 홍길동도 아니고. 남자는 카드 변경을 권한 후 해외 사용을 차단해줄까 물었다.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기 전, 나는 또 이렇게 묻고 말았다.


“진짜 보이스피싱 아니죠?”

“휴~. 아닙니다.”


딸칵. 남자의 깊은 한숨을 듣고 나니 정말 미안했다. 죄송해요. 술, 아니 잠이 덜 깨서 그랬답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으니 종로 경찰서 아무개 형사님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카드 정보가 글로벌 공공재가 된 지 오래인데 다른 금융 정보인들 무사할까. 내 명의로 대포 통장이 만들어졌고 그걸로 웬놈들이 사기를 쳤구나! 하지만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내가 좀 일관성 있는 성격이다―또 넌지시 물었다. 혹시 보이스피싱……? 형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이놈들 때문에 힘들다고. (예전 사무실 절도건을 수사했던 형사 역시 커피를 얻어마시며, 얼마 전 보이스피싱 사기단을 검거했다고 자랑한 바 있었다.) 나는 한참 대화를 나누면서도 간간히 “보이스피싱 아님?” 했고,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추궁에 형사는 담당 검사를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바톤터치한 검사님은 메마르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설파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법은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이랍니다. 그런데 진짜 보이스피싱은 아니겠……? 이런 도돌이표 같은 심문(?) 끝에, 나는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조했다. 드디어 낚싯바늘을 향해 입을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검사는 거래 은행과 계좌 잔액 등에 대해 물었고, 나는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통장 거래 내역도 살펴볼 수 있도록 ‘동의’해주라고 했다. 진짜 명의를 도용당한 것인지, 아니면 공범인지 알기 위해 필요하다고.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아니, 왜……?” “제 프라이버시라서요.” 아, 드디어 알아차렸느냐고? 아니다. 나는 여전히 검사님을 신뢰했다. 그런데 무슨 심보인지 그냥 싫었다. 검사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려다가 “배는 고프지만 먹기 싫어요.” 하고 돌아서는 형국이니 얼마나 기가 차고 시간이 아까웠겠는가. 게다가 이 여자의 통장 잔고는 다 합쳐도 50만 원이 안 됐다. 그때 이미 이번 낚시는 폭망이다 싶었을 거다. ‘이 여자야, 지킬 프라이버시가 있긴 한 거니?’ 따져 묻고 싶었겠지. 그러나 검사님은 마지막까지 메소드 연기를 펼치셨다. “소환장 보낼 테니 출두하세요.” 그렇게 삼십 분 가깝게 통화하다가 막상 끊고 나니 걱정이 됐다.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들쳐업고 종로경찰서까지 가야 하나. 그냥 동의해줄 걸 그랬나. 우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장대소한다. 보이스피싱이란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전화를 끊고 검색했더니 보이스피싱이 맞다. 그럴 리가. 진짜 형사님 같고, 검사님 같았는데. 목소리나 말투가 딱 그랬는데.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스피싱을 다룰 때 조선족 말투로 우스꽝스럽게 표현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러니까 자꾸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에 대해 오해하잖아.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프로페셔널하다고! 바보들만 속는 게 아니라고! (아마 난 바보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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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루어(lure) 낚시라고 들어보았는지? 루어란 털, 플라스틱, 나무, 금속 등으로 만든 인공 미끼를 말한다. 생김새가 지렁이나 새우, 작은 물고기랑 똑같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짜 미끼에 속는 물고기의 아둔함을 조롱한다. 그러나 물고기가 루어 미끼에 낚이는 이유는 생김새 때문이 아니다. 무릎을 툭 치면 종아리가 올라가는 것처럼 물고기 역시 특정 자극에 반응하는 성질이 있다. 가짜 먹이에 속아서가 아니라 루어가 만들어내는 수중 파동의 진원지를 공격하는 것이다.


속이고 속는 과정도 비슷하다. 혹자들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만 속는다고 생각한다. 물고기가 루어 미끼의 생김새 때문에 낚인다고 오해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어찌 그리 쉽게 속을 수 있느냐고 의아해한다. 그런데 ‘쉽게’ 속는 게 아니다. 거짓말의 그물망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고 질기며 신축성이 좋다. 그러니 내가 걸리지 않았다면 그건 똑똑해서가 아니라 파동의 진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걸려들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거나.


4월 15일. 또 낚싯대가 드리워졌다. 루어가 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투표 잘합시다!


권은정 작가 👉 소설가. 칼럼니스트. 테크니컬 라이터. 텍스트로 이루어진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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