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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의 안부, 백구의 안녕

몇 년 전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나고 똑바로 누울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파 생애 최초 MRI를 찍고 받은 진단이었다. 다양한 병원을 다니며 디스크 호전에 효과적이라는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지만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때 동네에 있는 한의원 선생님께서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만두고 매일 30분씩 꾸준히 걸어보라 권하셨다. 그 당시에는 나의 허리 통증에 공감 못하는 선생님이 원망스럽고 누구나 할 법한 말을 진료비를 받고 해준다는 점에 반발도 들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가장 최고의 치료법이 걷기였음을 지금은 동의한다.


친동생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나의 가장 나쁜 점이라 지적했는데, 제 버릇 개 주냐고,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사라진 통증에 과거의 고통은 잊어버리고 꾸준하던 운동도 함께 그만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최근 어느 날 아침 허리가 묵직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통증이 돌아오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 걷기를 너무 오랫동안 멀리했구나’ 반성하며 이제라도 다시 걸어보려 집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혼자 하는 산책에 몇몇 새로운 풍경들을 발견했다. 내가 살고 있는 경기 남부 리 단위 시골에는 여전히 대문이 없거나 문을 열어둔 집들이 많다는 것. 또 그 없는 대문의 자리에 줄에 매인 개들이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사납게 짖어대 멍한 채 걸어가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깜짝 놀라 넘어질 뻔한 사람은 나다. 너무 놀라서 입 밖으로 욕을 크게 뱉은 것 또한 나였다. 당장 물어뜯을 기세로 짖어대 나도 반격하겠단 심정으로 얼굴을 보면 그 개들은 대체로 몸집이 작았다. 그 작은 몸을 팽팽하게 당겨진 끈에 의지해 두 발로 일어서 짖어 대는 모습이 꽤나 용맹하게 보였다. 용맹해 보인만큼 무섭기도 했다. 끈이 끊어질 것 같기도 했고 흙 바닥에 박아둔 말뚝이 뽑힐 것 같기도 했다. 무서운 마음에 급하게 한 집 앞을 지나면 얼마 못가 또 이런 집이 나왔다. 지붕의 색만 다를 뿐 비슷 비슷한 집들. 개들의 모습도 닮아 있었다. 소형견인 만큼 삽살개처럼 털이 복슬복슬하거나(몹시 엉켜있고 제멋대로 자란 털은 눈을 가린다) 어느 대에서 웰시코기가 섞인 것인지 못생긴 얼굴에 다리는 짧고 허리는 길었다. 간만의 산책이 사나운 소형견들을 피해 달아나는 도망이 되어 의도치 않게 달리기를 했던 날, 나는 산책의 중간 즈음에서 반가움에 짖어대는 개를 보았다. 적의에 가득 차 사납게 짖어대는 것이 아닌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사랑받고 싶어하는 목소리였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않아 5-6개월 정도로 보였는데 백구로 통칭되는 외모에 힘찬 꼬리 돌리기가 몹시 귀여웠다. 내가 자신과 눈을 맞춘 것이 반가웠는지 곧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개는 자리에서 빙빙 돌며 꼬리가 떨어져 나가도록 흔들었다. 그러나 이 백구도 임무를 맡고 줄에 매여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로 난 길을 발견해 걸어 들어왔던 것인데 집 주인이 밭의 작물들을 지키고자 개를 고용한 것인지 개는 감나무와 고추밭 사이에 집을 두고 묶여 있었다. 개를 만져주기 위해 남의 고추 밭을 가로지를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개를 조금 더 바라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보면 볼수록 개의 꼬리가 애처롭게 휘둘리는 듯해 그만 보고자 서둘렀던 것인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개의 목소리가 걸음을 느리게 했다. 이것이 개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이후로도 2-3일에 한번은 산책길에 나섰다. 결혼 전에는 남동생과 하루에 1시간 이상 함께 걸었었기에 혼자 하는 산책이 유독 낯설었다. 그래도 한 달 정도 지나가니 나만의 속도로 걸을 수 있어 점차 즐겁게 느껴졌다. 사실 저녁을 먹고 밤 산책을 하고 싶었으나 저녁 이후에는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전 시간을 활용해 산책을 다니곤 했다. 새로 난 길은 산책하기에 정말 좋은 길이었다. 넓었고 차량 통행은 거의 없었으며 적당히 경사가 져 운동에도 좋았다. 나만의 산책 코스가 되어 늘 지나는 길이 되었다. 2-3일에 한번, 부지런 떨면 어느 주에는 매일 30-50분 정도 산책을 했다. 자주 지남에도 웰시코기를 닮은 개와 삽살개는 나를 볼 때마다 심하게 짖어댔다. 언젠가 한 번은 줄에서 풀려 있는 삽살이가 죽일듯 짖으며 쫓아와 발목 근처까지 왔다. 터져나오는 비명을 막으며 최대한 의연하게 대처하려 울상으로 발을 동동 구를 때 어디선가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셔서 개를 불렀다. 언제 그렇게 사나웠냐는 듯 개는 할머니께 뛰어갔다. “아이고 괜찮아, 안물어요~ 안물어” 하고 나를 안심시키려 하셨지만 할머니가 조금만 늦게 나타났더라면 개는 분명 나를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처럼 조금 천천히 백구의 집 앞을 지났다. 산책 때마다 백구는 나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만져주지는 못했지만 개를 바라보고 무사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산책 중의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개가 보이지 않았다. 음... 개 주인이 데리고 어딘가를 간 걸까, 궁금해하며 감나무 근방을 배회하다 집으로 향했다. 백구의 행방이 궁금하고 걱정되어 다음 날 남편을 이끌고 저녁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여전히 백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양한 상상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혹시... 끈이 풀려서 튀어나왔다가 사고를 당했나... 혹시 개 주인이 나쁜 곳으로 데려간 것은 아닐까... 혹시, 혹시... 수많은 혹시들에 소란하던 마음은 며칠 내 해결되었다. 다시 백구가 그 자리에 돌아와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백구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달라져 있었다. 전처럼 나를 보고 반가워하지도, 꼬리를 흔들지도 않았다. 백구는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멀리 올려다보았다. 물론 나는 고추밭을 건너 그에게로 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순 없었다. 한 번이라도 등을 쓸어 내려준 적 없는 주제에 나는 더이상 그가 나를 반가워하지 않아 퍽 마음이 쓰렸다. 오늘도 아침 산책을 다녀왔다. 백구는 안녕했다.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진 않았지만 그의 무사함에 마음을 쓸어내리며 조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시인 김지은

소설 읽기가 취미이지만 시를 쓴다.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와 더불어 퐁당통신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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