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내 안에 백종원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가.


시작부터 너무 거창한가 싶지만 영국에 온 이후 심도(?)있게 고민하는 화두이자 늘 나에게 되묻는 게 바로 저거다.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무엇을 먹고살아야 하는가. 아마 나를 아는 사람들은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는 주제란 거, 나도 잘 안다. 먹을 게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말 그대로 밥을 참 맛없게 먹는 사람 중 하나다. 그래서 나에게 메뉴를 고르라는 건은 고역 중의 고역이다. 더 맛있는 걸 먹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나… 사실 내 속마음은 이렇다.


막내 기자였을 때, 마감할 때마다 저녁 메뉴를 결정해야 했는데, 그게 귀찮아 서너 번 내리 **도시락을 (난 이 도시락을 지금도 좋아한다) 사간 적이 있다. 다채로운 메뉴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메뉴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결국 한 선배가 ‘한 번만 더 이걸 사 오면 옥상에서 너를 떨어뜨릴 것이다’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지금 생각해보면 진담이다)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런 나에게 요리는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요리라 칭할 수 있는 것은 부끄럽지만 계란 후라이였다. 집에서 냄새나는 게 싫어서 김치는커녕 라면도 끓여 먹지 않았다. 영국 와서 양파를 처음 까 봤다는 사실에 내 친한 친구들조차 충격이라고 할 정도니 나란 애는 정말 요리로는 안 될 놈인 게 확실했다.

ree

어쨌든 이렇게 맛에 둔감한 내가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맛없는 걸 먹을 때다.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로, 정말 맛없는 걸 먹었을 때 나는 분노를 금치 못하곤 한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맛없는 곳 중 하나는 강남구청역 근처에서 먹었던 새우죽과 선정릉역 백반집 계란찜 정식이다. 화가 나는 포인트는 이 맛없는 걸 먹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썼다는 것은 물론,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음식점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는, 전 인류애적인 마인드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음식 장사로 사람의 입맛을 농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영국에 간다고 했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음식에 대해 걱정했다. 그러나 내심 다행이었던 게 나라는 사람은 음식에 얼마나 둔감한 사람인가. 맛없는 영국 음식에 최적화될 수 있는 모든 걸 갖췄다고 생각했다. 거기 가서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이민 가방에 28인치 캐리어, 그리고 몇십 리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배낭. 이 엄청난 짐을 바리바리 쌌지만 그중에 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


틀려도 단단히 틀려먹은 생각이었다. 영국 음식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별다른 게 없고 그래서 슬프게도 먹는 재미가 없다. 먹는 재미를 찾아 나선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영국 음식 레스토랑이 아닌 태국, 일본, 인도 등 다른 나라 레스토랑에서 말이다. 이곳에서도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은 다 다른 나라 음식점이다… 어쨌든 이런 외식은 생각보다 훨씬 비쌌다. 대충 걸치고 나가도 5분이면 편의점 두 군데를 돌고, 나가는 것도 귀찮을 땐 배달 앱으로 음식을 시키면 그만이었던 라이프는 여기에 없었다.


ree

심지어 영국에 도착해서 첫 교양 수업을 듣는데, 교수가 영국인을 만나면 늘 음식 얘기로 대화를 시작하라고 조언해줬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음식으로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로라도 즐겁고 싶다는 게 요지였다. ‘하하하, 영국 사람들 유머하고는’ 웃으며 넘어갔는데 거짓이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약 일주일간 토스트, 빵, 샌드위치를 돌아가며 먹었다. 모두 빵 같아 보이지만 다른 종류로 먹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여기에 특별식은 프랜차이즈 스시집에서 판매하는 누들과 스시.


아, 감자도 빼놓을 수 없다. 찐 감자, 베이컨과 함께 삶은 감자, 치즈 올린 감자… (감자 요리는 함께 살았던 플랫메이트 덕분에 먹을 수 있었다) 그날 역시 식빵을 잘근잘근 씹어먹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가장 화나는 순간을 영국에서 이렇게 마주했다. 극도로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코 맛있지 않은 걸 계속 먹는 것 역시 견딜 수 없는 포인트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맛이란 무엇이고 먹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던 때가. 그리고 하나 더, 내가 맛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긴 고민 끝에 결론 내릴 수 있었다.

ree

한국에서 나는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요리를 하는 행위는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일단 기본적인 소스를 갖추는 것부터 거추장스러운 일이고, 거기에 밑 재료를 사고 손질해야 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지치는 일이었다. 그럴 시간에 나가 놀거나 원고를 하나 더 쓰거나 영화를 하나 더 보거나, 그런 게 더욱 생산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내 입에 넣을 음식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내가 다른 걸 채우겠다고 이를 등한시하며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결국 남은 건 영국에서 ‘I am hungry’ ‘I am not full’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요똥(요리 똥손) 양열매만 존재할 뿐이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유튜브 백종원 채널 및 페이스북 자취생 요리 페이지 구독하기. 그 영상을 보다 가장 만만한 스팸 돈부리로 첫 요리를 시작했는데 양파 까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영상은 고작 3분이면 모든 과정이 끝나던데, 그걸 몇십 번 돌려봤는지 모른다. 이걸 만드는 데 장장 두 시간이 걸렸다. 배고파서 만들기 시작했지만 다 만들고 나서 너무 지쳐 한동안 의자에 꽤 오래 앉아있던 거로 기억한다. 그렇게 내 첫 요리는 무사히(?) 마무리되고 그 뒤로 볶음밥 정도는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올라왔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한 요리에 감탄하며 ‘美味’가 떠오를 만큼의 요리왕 비룡이 되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는 아직 묘연하다.


ree

생각보다 즐거웠던 건 내가 해 먹을 음식의 식자재를 내 손으로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는 것. 사 먹는 것은 비싸지만 식재료는 한국보다 훨씬 싼 영국 물가 덕분에 그 와중에 꽤 괜찮은 걸 선별하려 노력하는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얘네들의 정보를 찾아 읽는 재미랄까. 또 다른 생경함은 요리를 하면서 오롯이 나를 위해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점 일거다. 아직도 요령이 없어 꽤 시간이 걸리고 요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만 이 감정과 시간이 싫거나 꺼려지진 않는다. 그렇다고 평생 해보지 않았던 요리가 여기 와서 즐겁고 하고 싶어 미치겠는 마인드 역시 1도 없긴 하지만. 음식을 하게 되면 누구나 갖는 생각일 텐데 그걸 이제야 느끼고 배우는 중이다.


아까 점심을 먹은 후에 원고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벌써 오늘 먹을 저녁이 걱정이다. 요즘 슈퍼 갈 시간이 없어서 있는 거라곤 도시락용으로 얼려 놓은 소시지 볶음밥과 식빵 밖엔 없는데… 원고를 쓰다가 스리슬쩍 백종원 채널을 검색해 봤는데, 천국의 맛 치즈 토스트 영상이 며칠 전에 업로드되어있다. 천국의 맛이라니! 안 누르고 배길 수가 없는 타이틀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오늘 저녁은 천국의 맛 토스트로 결정했다. 꽝꽝 얼려놓은 식빵과 먹다 남은 치즈가 음식 지옥 이곳에서 천국으로 인도해주길.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잠깐이나마 가장 먹고 싶은 쭈꾸미 볶음을 생각하며 진심을 다해 바라본다.

에디터 양열매 👉 독립잡지 <라인>발행인 겸 온오프라인 에디터로 일했다. 지금은 영국에서 디지털 퍼블리싱을 공부하는 중이다.



ree

댓글


Studio
Function.

ⓒ 2017. function all right reserved.

  • Facebook
  • Instagra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