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연예인
- 퐁당 에디터
- 2020년 5월 8일
- 3분 분량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친하게 지내는 언니가 전화를 걸어 “김치 좀 줄까?” 한다. 나 역시 시가(媤家)에서 김장김치와 총각무를 한 통씩 받아온 터라 그냥 “됐소.” 했다. 피차간의 용무는 끝났지만 곧장 끊긴 서운해 명절 얘기를 서너 마디씩 주고받았다. 말끝에 “이번에도 술만 마시고 왔네.” 툭 뱉고 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기가 막혔더랬다. 당최 어울리지도 않고 누구 하나 책무를 요구하지도 않지만 명색이 맏며느리인데 술만 마시고 왔다라니. 새삼스레 술과 인연이 깊구나, 싶으면서 이참에 첫사랑 주절거리듯 술에 대한 썰을 풀고 싶어졌다. #술맛 #중2 #별맛 술꾼인 아버지를 둔 탓일까. 어릴 적부터 ‘술맛’이 궁금했다. 손님이 돌아간 뒤 엄마가 술상을 치울 때면 남은 술을 마셔보고 싶단 갈망을 느꼈다. 하지만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 탓에 엄두를 못 내다가 중학교 2학년에 들어서―나는 정확히 열다섯 살, 2월에 사춘기가 왔다―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유리 장식장에 있는 아버지 양주에 손을 댄 것이다. 나는 벌벌 떨면서 그 투명한 액체를 뚜껑에 따른 뒤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더니. 그토록 고대하던 술맛은 한마디로 시시했다. 식도가 짜르르 타오르는 강렬함도,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이상기분도 없었다. 당연할 수밖에. 내가 마신 것은 토닉워터였으니. 그러나 토닉워터가 양주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꽤 한동안 아이들에게 술맛에 대해 떠들고 다녔다. “술? 그거 별 맛 없어.”

#수능백일 #차사빤스 # 첫 경험
1994년 8월, 찌는 듯한 더위 속에 12명의 여고생이 동아리방으로 집결했으니 수능 백일날. 슈퍼집 딸내미 2학년 선배는 공금으로 자기 집에서 막걸리를 열 병이나 사왔다. 자율학습 중에 잠깐 동아리실로 내려온 3학년 언니들은 후배들이 따라주는 백일주를 홀짝거리며 온갖 엄살을 떨어댔다.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냄새 나게 왜 막걸리냐, 감독 선생님한테 걸리면 죽는다……. 두 병을 채 못 비우고 3학년들이 교실로 돌아가자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드디어 술맛을 보겠구나!
그러나 2학년들은 치사했다. 3학년들이 남긴 막걸리 반 병을 자기네들끼리 나눠 마시더니 뚜껑 안 딴 막걸리 여덟 병을 도로 까만 비닐봉다리에 집어넣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니들도 주까, 묻지 않았다. 막걸리에 취하면 애비에미도 몰라본다나? 필시 우리의 하극상이 두려웠던 게다.
동기 중에 가장 공부 잘하고, 선생님께 신망 두텁고, 반장이기도 했던 성순이가 막걸리는 별로란다. 여름엔 맥주란다. 성순이 부모님이 집을 비웠을 때 나는 드디어 첫 술맛을 맛보았다. 355ml 맥주 두 캔을 셋이서 나눠 마셨는데, 음, 맛은 그냥 그랬다. 단맛 빼고 쓴맛 넣은 맥콜 맛 같았다. 바나나, 치즈, 첫키스가 그랬던 것처럼 맥주 역시 상상했던 맛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성순이 부모님이 집을 비우면 모여서 맥주를 마셨다.
#오리엔테이션 #소주 #재능
첫 술맛이 그냥 그랬다고 했던가? 그럴 수밖에. 나는 소주파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대학 오티에서 알았다. 또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술이 엄청엄청 세다는 거. 친구 집에서 부모님 몰래 맥주 한 캔 마시는 게 일탈의 전부여서 그동안 몰랐던 거다.
처음이었다, 그런 건. 뭔가 독보적이라는 느낌. 실로 재능이라 불리울 만했다. 글 쓰려고 들어간 대학에서 뜻하지 않은 재능을 발견했으니……. 무릇 재능은 갈고 닦아야 하는 법. 나는 우직하고 성실하단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마셨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만약 이슬람권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아마 나의 재능을 평생 모르고 살다 죽었겠지. 이 세상에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미처 모르고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여담으로, 훗날 고등학교 동아리 엠티를 떠나 성순과 대작을 했다. 우리는 사뭇 경건하게 자세를 갖추고 침묵 속에서 술잔만 부딪쳤다. 동이 틀 무렵, 성순이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옆으로 픽 쓰러졌다. 내가 이겼다.
#보아 #솔비 #유리 #안동권씨
나의 조모(祖母) 김순남 여사가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안동 권씨 집안에 술 못 마시는 딸 없다.” 정작 본인은 아들만 다섯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나는 뵙지 못한 윗대 권씨 여식들의 주량을 익히 보아온 터에 하신 말씀이렸다. 그러니까 결국 내게 술이란 집안의 내력이자 거부할 수 없는 유전자의 힘, 광폭한 운명적 전개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할머니의 단언을 끊임없이 목도하였다. 내가 만난 모든 동성 여인들은 술을 잘 마셨다. 인터넷 연예뉴스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아(본명 권보아)는 주량이 소주 다섯 병, 솔비(본명 권지안)는 소주 네 병, 유리(본명 권유리)는 소녀시대 최고의 주당이란다. (그녀들의 본명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유효기간 #습관 #ing
갑자기 슬프다. 술 얘기를 쓰는데 술이 땡기지 않는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첫사랑 주절거리듯’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토록 성실하고 우직했던, 재능의 낭비 따윈 없었던 나의 음주행각은 다 옛날 얘기다. 꽤 오래 전부터 술이 맛이 없고 재미가 없어졌다.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존재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고 간절한가와는 무관하게. 시간을 다한 인연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난다. 매몰찰 만큼 갑작스러운 이별이 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는 새 서서히 멀어져간 인연들도 있다. 반면에 진작 끝난 사이가 인연의 시간이 남아 있어 마침표를 찍지 못한 경우도 있다. 소진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맛도 없고 재미도 없지만 여전히 나는 술을 마신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마음이 허허로울 때, 술을 대체할 만한 좋은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술 마시기를 한사코 원한다. (명절 내내 술을 마신 것도 이러한 연유다.) 오랜 연인처럼 설렘도 애정도 남지 않은 말라비틀어진 관계지만 우리는 아직 함께 한다. 욕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습관만 남아.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은 또 술을 마실 테다.
칼럼니스트 권은정 👉 소설가,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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