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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을 찍었다

동대문구 제기동에 볼일이 있었다. 늦은 저녁이었는데 아이들 넷이서 뭔가 애타는 표정으로 세븐일레븐 앞 벤치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익숙한 분위기였다. 포켓몬고 앱에 로그인 했다. 역시.

그곳은 공개된 지 얼마 안 된 포켓몬 캐릭터 ‘디아루가’가 도사리고 있는 체육관이었다. 네 명의 남자아이들은 20레벨, 30레벨 초반대의 계정들을 가지고 있었고, 디아루가를 너무나 갖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중이었다. 나는 레이드 패스를 꺼내 팀에 합류했다. 120초가 지나고 우리들 앞에는 거대한 디아루가가 나타났다.

“오!!!!!” “오~~~~~” “타격감이 달라~~~~~~” “오! 이번엔 되겠다!!!”

그래 녀석들. 내가 바로 만렙누나다. 힘을 합쳐 디아루가를 얻는 데 각자 성공하고 나는 물었다.

“동대문구 레이드 팀이세요?” 모르는 사이라면 아무리 나이 차이가 커도 존댓말은 필수다.

“홍대 가는 버스는 이쪽 방향에서 타나요, 아니면 건너서 타야 하나요?”

“이쪽이에요~ 저기 간판 불 보이시는 데 쯤에 버스 정류장 있어요.”

미성년자 전우들에게 경의에 가득 찬 눈빛을 받으며, 늙은 유저는 도가니를 주무르며 버스를 타러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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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전쟁 중인 사람에게 내가 즐겨 추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포켓몬고 게임이다.


나는 속초 유학파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포켓몬고 게임이 가능했지만 한국에는 아직 오픈되지 않았을 때, 웃기게도 속초와 울산 일부 동네에서만 포켓몬고가 가능해 화제가 되었다. 전국의 지우(〈포켓몬스터〉의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은 이슬이다) 꿈나무들이 속초로 몰려왔고, 속초의 시장경제가 갑자기 활성화되었다. “한국의 태초 마을이 속초다.”, “속초처럼 아무 노력 없이 갑자기 잘되고 싶다.” 사람들의 재치 있는 말들이 SNS에 넘실거렸고, 한동안 속초는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때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함께 홀린 친구들과 속초로 유학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많은 포켓몬 친구들을 만들었다. 나의 잉어킹과…… 나의 단데기와…… 나의 캐터피와…… 나의 디그다와…… 게임에 푹 빠져서 이틀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포 켓몬고가 한국에서 정식 오픈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불안과 우울로 감정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바깥으로 나와 걷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러나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는 일부터가 벌써 너무 높은 벽이다.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일어나도 씻기가 힘들고, 나가기 전 첫 끼 첫술을 뜨기가 힘들고, 선크림 바르기도 힘들다. 정말이지 무기력만 한 장사가 없는 게 바로 우울과 불안이다. 그때 포켓몬고가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한 명의 지우가 되어서 상수동 합정동 망원동 연희동 서강대 이화여대 연세대 등등 사방팔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다. 게임에 몰두하고 있으면 걷는 중이라는 생각은 어느새 사라진다. 어둑어둑해져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아, 다리가 아프네’ 하고 깨닫는 게임이 바로 포켓몬고다.


포켓몬고는 정말 쉽다. 머리를 쓸 일이 없다. 그저 걸어 다니면서 요기조기 나타나는 포켓몬을 잡고, 포켓 스탑이 나오면 빙글빙글 돌려 아이템을 얻고, 체육관이 나오면 다른 팀과 싸워보기도 하고, 같은 팀일 때는 나무 열매로 힘을 북돋아주고 지나가기도 한다. 아. 지금은 처음보다는 조금 복잡한 게임이 되었다. 그동안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주요한 새 기능은 친구 맺기인데, 이 기능으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기능은 더더욱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친구 맺기 기능이 생긴 이후 세계 곳곳의 사용자들과 친구를 맺어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고, 외국에서 보내온 알을 부화시킬 수도 있다. 외국 친구들이 보낸 선물을 열 때면 외국 포켓 스탑의 사진이 뜨기 때문에 그곳의 풍경을 엿볼 수도 있다. 나의 포켓몬 친구들은 일본, 벨기에, 미국, 인도, 프랑스, 독일, 멕시코, 베트남 등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물론 뭐 하는 분들인지는 알 길이 없다.


레이드 배틀 미션이 생기면 나는, 우리 지역 포켓몬고 사용자들의 오픈 카톡에 접속해 그날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슬쩍 보고 길을 나선다. 서교동 성당 앞, 또는 서강대학교 알바트로스 동상 앞, 성미산 마을극장 앞 등에서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며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높은 확률로 포켓몬고 유저들이며 전설의 포켓몬과 진지하게 전쟁 중일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전설의 포켓몬을 쓰러뜨리고 나면 고개를 들어 서로에게 인사를 건넨다. 슬쩍 눈인사하면 무리에서 몇 번 마주쳤던 분들이 답례하신다.


“어? 암탉 님 오랜만이에요~” “저 이로치1) 잡았어요!” “휴. 전 전두환 시절 디아루가2)가 나왔네요.” “저보다 낫네요. 전 일제강점기 때 어르신3)이 오셨어요.” 소소한 인사를 나누고, 우리끼리 알아듣는 농담을 주고받고, 또 다른 레이드가 오픈되는 근처 체육관으로 이동한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한 장면처럼 한 무리의 남녀노소가 동네를 누비고 다닌다. 그들은 닉네임으로 불리며, 연령대 정도만 오픈되어 있다. 직업이 무엇인지,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 집안 사정이 어떤지 본인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서로 알 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주일에 50킬로씩 걷는 날들이 흐르고 흘러, 만렙을 찍었다. 내 평생 제일 잘했던 게임 ‘슈퍼마리오’도 끝판 대장 쿠파가 나오면 매번 패배하고 말았었는데(그때는 초등학생이었다) 인생 최초의 만렙을 서른여섯에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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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했다. 살이 찐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걸어 다녔는데도 나잇살인지 잘 입고 다니던 바지의 허리가 조이는 듯했다. 후크와 금속 장식이 닿는 부위가 독이 오른 것처럼 간지러웠다. 뱃살이 급격히 쪄서 살이 트려고 하는 걸까. 내 살을 만지는데 내 살 같지 않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피부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이 불이 켜지는 커다랗고 귀여운 돋보기를 들고 유심히 살피시더니 말씀하셨다. “대상포진입니다.” 과로하고 과로하고 과로하면 걸린다는 바로 그 병,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무려 포켓몬고를 하다가 말이다. 온갖 약들과 연고를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오며 박장대소를 했다. 참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나에게 큰 박수를 보내면서 한동안 매일매일 연고를 발랐다. 1) 이로치가이(いろちがい)에서 가져온 별명. 색감이 일반 포켓몬과 달라 희소성 있는 포켓몬을 뜻한다. 2) CP(Combat power, 전투력) 1987의 디아루가를 말한다. 전두환 정권 시기와 비슷해 붙은 별명. 3) CP 1910의 포켓몬을 말한다. 전투력 수치를 연도로 치환해 1910년생이라고 표현했다.

탁수정 👉 과거 출판 마케터. 현재 미투 활동가. 대체로 깊은 고민에 빠져 지내지만, 결국은 다 잘 될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정서적 안착에 당도한 자의 유쾌 발랄한 생존 스토리 《내 꿈은 자연사》를 막 출간해 절찬리에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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