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 퐁당 에디터
- 2021년 1월 4일
- 4분 분량
고등학교 때였다. 첫사랑이라 할 만한 사랑에 빠졌다. 나와 그 사이에는 대단한 스토리가 있었다. “알고 보니 내 친동생” 같은 K드라마적 막장까진 아니었어도, 스토리 안에는 집안과 집안이 얽혀 있었고, 세상이 반대할 만한 요소도 있었고, 게다가 짝사랑이었고, 게다가 그의 애인은 세상에 둘도 없는 미녀였다. 애초에 짝사랑인데 세상의 반대가 다 뭐며 집안이 얽혀 있는 게 무슨 대수인가. 게다가 그는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나 같은 애들은 주변에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세상이 반대할 기회도 없었건만 마음은 이미 줄리엣이었다. 그래서 세상의 반대를 어깨에 짊어진 채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담임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칠판 대신 창밖의 낙엽을 보며 뚝뚝 눈물 흘리는 나를 보며 당시 유행어를 만드셨다. “탁수정~ 니 무슨 고민 있나?”고민은 끊임없이 되새김질되었다. 하나 안하나 해결되지 않을 고민이었지만 슬픔의 질감을 즐기던 질풍노도의 시기였기 때문에 그 고민은 실은 결코 해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이승기를 닮은 헌칠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아이돌 연습생이었는데 어찌어찌 일이 꼬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꿀이었고, 언제나 웃고 있는 미소머신이었다. 게다가 나는 지방 출신이지 않았겠는가. 아이돌 연습생이라니! 그는 어렵지 않게 나를 사로잡았고 우리는 불타는 사랑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가 정말 아이돌 연습생이었을까? 알게 뭐람. 기억에 가장 또렷이 남은 건 그의 왼쪽 팔뚝에 있는 ‘하다 만’ 문신인 것을. 뿐만이랴. 거식증 걸린 것이 안쓰러워 챙겨주다 사랑에 빠지질 않나, 제일 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기질 않나, 우리 이제 사귀는 건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가 폴리아모리인데 괜찮겠냐고 물어오질 않나. 여하간 장르도 다양했다. 공포 스릴러 빼고 다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사랑밖에 난 몰라’ 스타일의 십 대와 이십 대를 우당탕탕 보내고, 지금에 안착했다. 그 안착이 사회적 안착이고 경제적 안착이면 좋으련만, 정서적 안착이다. 가장 시시한 안착인가 싶지만 가장 중요한 안착일 수도 있다. 감정에 물기가 적당히 빠지면서, 삶의 방식이 조금 더 명료해졌다. 같은 우울이라도 더 젊을 때의 우울과 지금의 우울은 좀 다르다. 예전의 우울이 물론 멋은 좀 있었지만, 그 멋 때문인지 고칠 생각이 좀체 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울은 현실적이다. 과장된 우울, 달콤한 우울이 아닌 실재하는 우울이었고, 나는 얌전히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을 먹으며 치료받고 있다. 피부에도 수분 부족형 지성이 있는 것처럼 요즘의 우울은 찐득하지 않고 버석거린다. 노화 중 가장 반가운 노화가 바로 이 감정의 노화 아닌가 싶다. 나는 소위 말하는 드라마퀸이다. “말 안 해도 알아요” 하시는 분들에게는 “눈썰미가 있으시군요, 그렇지만 모르는 척해주세요”라고 하고 싶고, “니가?” 하시는 분들에게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내가 가장 혐오하고, 스스로 짓누르고 숨기는 정체성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음. 이제는 과거형으로 말해도 될까. 지금은 뇌 속에서 드라마퀸적 버튼이 눌리면 즉시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대차게 사이렌이 울린다. 그래서 지금은 ‘내적 드라마퀸’이다. 속은 생겨 먹은 것이 어쩔 수 없어 그대로인 면이 없지 않지만 더 이상 드라마퀸적 성향이 내 삶에 심각하게 영향을 끼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라마퀸이 가장 취약해질 때는 스토리가 만들어질 만한 건수를 발견했을 때이다. 그냥저냥 한 나와 그냥저냥 한 누군가의 만남으로는 버튼이 충분히 눌리지 않는다. 알고 보니 어떤 시련에 놓여 있거나, 세상의 반대가 예상되거나, 평강공주 콤플렉스를 자극하거나, 신데렐라콤플렉스를 자극하거나, 함께해야 하는 대의가 있거나…… 등등의 조건에 부합하는 뭔가가 눈에 띄면 바로 그때 드라마퀸 버튼은 눌린다. 버튼이 눌린 때부터 실제 마음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동일까 수동일까. 온전한 내 의지일까, 한평생 세뇌되어온 그 무엇이 견인하는 것일까. 내가 드라마퀸 새싹 초등학생이었을 때, 친척 오빠가 갑작스레 결혼을 한다고 했다. 자격증을 따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는데, 선을 몇 번 보더니 선생님인 언니와 만난 지 석 달 만에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빠에게 물었다. “어떻게 석 달 만에 결혼 상대를 알아볼 수가 있었어?” 오빠는 씩 웃으며 말했다. “크면 다 알게 돼.”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온 나는 이제 사랑에 대해 냉정하게(에헴!)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우울과 불안으로 말라 죽어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울타리였다. 놀랍게도 아이돌 이모 팬들의 단톡방은 연애를 대체할 수 있다. 불타오르는 사랑은 한두 해면 끝난다는 것을 세계 수많은 박사님의 연구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 한두 해의 뒤는, 다들 알다시피 공동 명의 부동산이나, 대출 빚이나, 이미 태어나버린 자녀들이 맡고 있다. 또는 서로 간의 의리나 우정이나 파트너쉽이나 대내외적 이미지 관리나 포기하기 아까운 결혼 제도의 여러 이점 등이 맡고 있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서로 지지하는 관계의 안정적 소속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편히 숨 쉬게 한다.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직장조차도 해고될 위험이나 여타 폭력적 위협이 없다면 결혼만큼 안정감을 주는 소속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가족원을 다른 가족들이 밀어내지 않고 지속해서 서로 돌본다면 그 또한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소속감·유대감을 충족시키며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확실해 보이는 약속 안에서 인간은 안심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약속이 불완전함을 알기에 사회 제도에 기댈 수 있기를 원한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마련된 제도가 한 가지라는 것이다. 사랑. 사랑 중에서도 이성 간의 사랑. 불안 없는 삶을 향한 사회적 티켓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토대로 하는 이들에게만 발권된다는 것은, 그것도 이성애자들에게만 발권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 많은 로맨스 콘텐츠에 반강제적으로 노출된다. 실은 사랑이 별것 아니라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버리면, 국립도서관이 무너지고 음반 저작권협회가 무너지고 한국영상자료원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지구가 무너질 것만 같다.
로맨스의 지분이 이렇게까지 클 일인가.
나는 로맨스 청정 구역을 꿈꾼다. 로맨스가 각자의 삶에서 어떤 흥미로운 에피소드 정도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가족을 선택하고 등록할 수 있는 제도가 다양하게 연구되고 시도되기를 바란다. 안정감을 약속할 수 있는 제도가 사랑이라는 불안정한 하나의 감정을 바탕으로, 결혼이라는 단 한 가지 제도로만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드라마퀸으로 성장해버린 것이 뒤늦게 억울하다. 구태의연한 책들을 덜 읽었어야 했다. 한번 먹은 알약을 간신히 안 먹은 척할 수는 있지만 다 토해지진 않는다. 물론 드라마퀸으로 살아본 이 경험이 값진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사랑보다 더 넓고 깊은 감정, 또는 생존에 더 실리적인 지혜를 발견하고, 긴 여정을 함께할 연대자들을 찾아 제도의 인정을 받아내고 싶다.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까.
사랑이 아니어도 양질의 생활공동체 안에서 연대하며 살아갈 방법이 어디 없을까? 꾸준히 탐구해볼 것이다. 나의 멋진 친구들과 힘을 합쳐서.
탁수정 👉 에디터. 마케터. 활동가. 대체로 깊은 고민에 빠져 지내지만, 결국은 다 잘 될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정서적 안착에 당도한 자의 유쾌 발랄한 생존 스토리 《내 꿈은 자연사》를 막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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