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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은 처음이라

서른 살이 됐다! 20대에게 ‘서른살’이라는 지점은 “인생의 마지막 장(게임 오버. 계속 하시겠습니까?)”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서른살 증후근에 걸린 친구들은 단체로 최면에라도 걸린 듯 앞으로의 일을 계획할 때마다 서른살이 되는 해를 의식하면서 기이하게 행동한다. “4학년 마치고 어학연수 다녀오면 취업할 때 ‘30살’ 넘으니까…”, “그래도 ‘30살’ 즈음에 결혼하려면 앞으로 만나는 사람은….”, “이제부터 적금 부으면 ‘30살’에는 얼마가 모이니까…” 뭐 대충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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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하나같이 2020년을 기준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오싹하다. 우리 모두 최면에 걸렸던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꾸준히 최면을 걸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SNS에는 ‘30대 언니가 말하는 20대 현실 조언’ 같은 누가 쓴지 모를, 앞뒤 맥락 없는 글이 전설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증거. 아는 분도 꽤 있을텐데 거기에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들 목록이 쭉 나열되어 있고, 읽다 보면 마치 죽음을 눈 앞에 둔 이들이 버킷리스트라도 작성하는 것 같은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이런 것들을 주워 읽으면 서른 살이 되면 죽음에 맞먹는 절망감을 맞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서른 살은 너무 갑자기 다가온 것처럼 느껴진다. 맹세코 그만큼의 시간을 사용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10년이 이렇게 짧을 리 없잖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30번씩 보내고, 밥을 먹어도 만 번을 더 먹은 셈인데, 내가 그랬다고? 아, “더이상 20대가 아니라니!” 같은 말은 절대 아니다. 시간을 훌쩍 건너뛴 듯한 느낌에 왠지 찝찝하기 때문이다.


이미 30대인 사람들은 “그래도 20대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그건 당연하잖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는 타임-리프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주인공은 사건이 생길 때마다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주변 인물들은 (과거로 돌아갔으니 당연히)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데, 그게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내가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다면 그 멍청하게 반복되는 대사를 외워서 모조리 여기에 적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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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대부분의 타임-리프 영화 속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신나서 날뛰다가 끝에는 현재를 잃고 괴로워하고, 영화는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는 교훈을 전하면서 끝이 난다. 우리가 진짜 과거로 돌아간다면 영화보다 훨씬 괴로울 거라고 장담한다. 웬만한 영화는 그래도 잘 짜인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만, 보통의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속 하이라이트를 모두 더해도 10분짜리 영화 한 편도 만들기 어려울테니까.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 속에서 지난번 ‘그 인간’이 똑 같은 말을 하고 또 늘어놓고 있는 꼴을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웬만해서는 돌아가서 무얼 어떻게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원고를 써내려가는 오늘은 2019년 12월 29일. 말이 되니 안 되니 해도 주변에서는 지난 10년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 서른 살을 맞이하는 의식(?)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다같이 모여서 파티를 하기도 하고. 이런 와중에 계획 없이 가만히 서른 살이 됐다간 ‘빼박’ ‘아싸(아웃사이더의 줄임말: 히키코모리의 순화된 표현이기도 하다)’라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도 살면서 처음으로! 30살을 맞아 새해 계획을 세웠다. 글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서로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적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생략하겠지만, 만약 계획에 성공한다면 꼭 퐁당 독자들에게 다시 알릴 생각이다. 내년 이맘때 쯤 아무 소식이 없다면, 뭐 적당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시길.  


아, 미리 변명하자면, 사실 나는 ‘계획형 인간’은 아니다. 보통은 일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사람에 가깝다. 목표한 바를 이뤘다고 크게 기뻐하지도, 그렇지 못 했다고 크게 슬퍼하는 법도 없다. 그러니까 서른 살이 됐다고 이렇게 요란을 떠는 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서른 살이건, 스무 살이건 지면으로나마 이렇게 만나게 되서 반갑다는 말을 하고 꼬옥 전하고 싶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박지현 디자이너 👉 그래픽 디자이너. '박럭키'라는 이름으로 디자이너 최희은(A.K.A 맛깔손)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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