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냐? 나도 아프다
- 퐁당 에디터
- 2020년 5월 8일
- 3분 분량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행복 너,당신,그대,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중
새해다. 뜬금없이 그때 그 시절, 쉬는 시간마다 껑충한 다리를 뽐내며 책상 사이를 휘젓던, 좀 놀던 아이 경자는 우째 사나 궁금해지는 경자년 2020년이다. 경자는 얼굴도 예쁘고, 키도 늘씬하고, 사복 입는 날엔 옷도 잘 입어서 인기가 많았다. 공부는 좀 못했지만 그건 뭐 본인도 신경 쓰지 않던 바. 하지만 촌스러운 이름은 꽤나 못마땅했는지 자기를 경자가 아닌 경진이라 불러 달랬다. 경자는 호적에만 오른 이름이고, 집에서는 경진이라 부른다나. 그때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지금은 쫌 수상하다. 이름 세탁을 위한 구실이 아니었을까.

재미있지도, 신기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요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사실 경자에 대한 기억은 이게 다다. 같은 반이었던 것 말고는 우리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었다. 아마 키 작고, 못 놀고, 이름마저 흔한 나를 경자는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또뜬금없이 궁금해졌다. 혹시 경진년도 있을까? (검색해보니 있었다! 2000년이 경진년이었다!)
이처럼 맥락도 의미도 없는 생각들을 새해벽두에 하고 있는데, 오랜 지인들과의 단톡방에 새해 인사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들.
‘세상에 2000년 밀레니엄이 엊그제 같은데 거기서 20년이 더 지났다니~! 언빌리버블이여!’
‘ㅋㅋㅋ ㅠ 뭐든 이야기하다 보면 막 30년 전임…’
‘근데 어제보다 그때 일이 더 생생해~~ @@’
‘얘기만 하면 2,30년 전… 웃프다. ㅋㅋㅋㅋ ㅠㅠ’
2020년에 30여 년 전 같은 반이었던 경자를 떠올리며 경진년을 검색했던 나는 중년의 이심전심을 목격하고 탄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인들과 낄낄거리며 나누는 이야기 대부분은 이삼십 년 전 일들이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영 시시하고 재미가 없다. 소금조차 치지 않은 삶은 닭가슴살처럼 퍽퍽하고 밍밍해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러니 도시락 한 번 같이 까먹지 않은 그 시절 경자까지 소환하기에 이르렀나 보다. 하기사 돌이켜보면 흑역사다만 어쨌든 매일매일 새로운 기억들을 관자엽 안쪽 해마에 새기느라 정신없던 때이니 과거를 돌아볼 여력도 마음도 없었다.
특정한 사건이 아닌, 어린 시절이라는 다소 모호하고도 막연한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늦은 오후의 풍경. 붉은 벽돌 건물들 위로 해가 낮게 떠 있고, 그 아래 작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노랗고 붉은 대기 속에 오도카니 서서 나는 권태롭게 그 그림자를 바라본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지치도록 골목을 뛰어다녀도 해가 지지 않던 그 날들의 기억.
그런데 마흔이 넘은 지금은 하루가 너무 짧다. 아침 먹고 뒤돌아서면 점심 먹을 시간이다. 점심 먹으면서 저녁엔 뭘 먹을까 상의한다. 그렇게 저녁 먹고 나면 또 잠 잘 시간. 세 끼 밥 먹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끼만 먹을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사실 지금도 고민 중이다.)
경자는 그 껑충한 다리를 뽐내며 항상 성큼성큼 걷더니 2020년 경자년은 그 어느 예년보다 빠르게 온 기분이다. 마흔셋 먹도록 내적 성장이나 외적 결실 없이 나이만 꾸역꾸역 먹는 처지라 설렘보다는 민망함, 나아가 죄스러움마저 느껴진다. 빛처럼 내달리는 시간 속에 존재가 짜부라지는 이 위기감.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최승자의 詩 <일찌기 나는>中)’일 순 없다는 분기탱천으로 다짐했다.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겠다! 이러고 있는데 다른 단톡방에서도 새해 인사들이 쏙쏙 올라왔다. 감기몸살로 송년회에 불참한 분의 새해 인사와 덕담을 필두로 여기 단톡방에서는 건강 얘기가 화두였다. 그 내용은 딱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 중년의 이심전심이여! 나 역시 인후염을 동반한 감기몸살에 부비동염, 중이염까지 겹쳐 고생하는 중이다. 특히 중이염은 처음인데 상당히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한 쪽 귀가 먹먹한데다가 이명까지 들려 계속 물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다. 그나마 이 모든 질환을 이비인후과 한 곳에서 진찰받을 수 있다는 것이 소소한 위안.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가. 솔직히 아프니까 새해 다짐이고 뭐고 다 귀찮다. 드라마 <미생>에서 ‘정신력은 체력의 비호 없이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동감이다. 구호를 외치기 전에 올해엔 운동부터 좀 해야겠다. 어쨌든 이천이십 년도 호기롭게 스타트 업!
1) "아프냐? 나도 아프다" : 2003년 7월 28일부터 2003년 9월 9일까지 MBC에서 방영된 14부작 드라마 ‘다모’에서 나온 유행어.
권은정 작가 👉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 다양한 글쓰기와 함께 육아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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