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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 있는 삶

태어나 보니 나는 고양이였다. 브리티시 숏헤어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그냥 ‘영국에서 온 짧은 털 고양이’라는 뜻이다. 그게 다야?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할 때 털이 많다거나, 짧다거나, 영국 사람, 한국 사람이라는 식의 설명이면 충분할까? 게다가 나는 인간의 나이로 치면 벌써 청년기에 접어들었는데 여전히 우쭈쭈를 당하면서 산다. 오직 유일하게 대장님만이 나를 어엿한 인격체로 대한다.


“기왕 태어났으니, 무엇이 되었든 야마가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의 대장님(맛깔손 A.K.A 최희은)과 어느 날 조찬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온 말인데,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마음에 드는 비유다. 대장님이 삶을 대하는 각오이기도 하고, 나에 대한 칭찬도 포함되어 있다. 나야말로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머리-몸통 비율로 따지면 ‘야마(머리)’가 가장 큰 존재니까. 기왕이면 내 존재를 끊임없이 긍정해주는 사람이랑 사는 게 좋으니까. 게다가 머리가 큰 존재가 되는 데에는 별 노력이 필요 없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면 될 뿐. 미안하지만, 재능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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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장님이 말한 ‘야마’는 뭔가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는 생물이 되라는 뜻이다. 실제로 대장님은 지난해에 어느 미술 전문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뽑힐 정도로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다. 나나 대장님이나 인스타그램 게시물 수는 300개 정도로 비슷한데, 대장님의 팔로어는 나의 30배 가까운 6,000명이다. 물론 대장님도 사람인지라 약점이 있다. 너무 밤낮없이 일을 한다는 점이다. 한번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 일어날 생각이 없다. 의자에 뿌리내린 식물 같아서 물만 주면 싹도 날 것 같다.


안타깝지만, 도대체 그럴 거면 집은 뭐 하러 얻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대장님을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집 월세나 대출 이자를 갚는 데 쓴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집에는 가지 않고 밤새도록 일해서 집세를 갚다니, 인간들이 원하는 행복은 이해할 수 없다. ‘노답’이다.


게다가 디자이너란 직업은 스스로를 일상적으로 학대하는 데 너무 익숙해서 옆에서 보고 있기가 딱하다. 우리 대장님만 해도 얼마나 책상에 붙어 있었는지 척추는 한쪽으로 휘어서 추간판이 탈출했는데, 일하는 내내 모니터랑 키보드는 죽어도 중앙 정렬을 맞춰야 한다.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식탁에 차려 놓은 숟가락, 젓가락을 정확한 위치에 좌측 정렬하는 데 한참 시간을 보낸다.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가만히 옆에 가서 내 머리를 들이밀고, 가끔은 배도 내준다. 내 털이라도 쓰다듬으면서 잠깐이나마 모니터에서 눈을 떼라고. 남의 속도 모르고 비실비실 웃는 대장님, 함께 일하는 박럭키(A.K.A 박지현) 님도 그제야 다가와서 나랑 놀아준다, 싶지만!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촬영에 돌입한다. 포즈를 바꿀 때마다 백 장은 찍는 것 같다. 박럭키 님의 말에 따르면 100장쯤 찍어야 한 장을 건진다는 것이다. 아마 수평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디자이너의 고양이가 다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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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처칠(브리티시 숏헤어)

👉 그래픽 디자이너 맛깔손 님의 어시스턴트로, 귀여움을 업으로 삼고 있다.


도움. 디자이너 맛깔손

👉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좋아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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