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의 시대
- 퐁당 에디터
- 2019년 8월 20일
- 2분 분량
세기말에 지은 20년 된 아파트에 이사 오기 전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짐을 들이기 전의 집은 백지처럼 하얬다. 책 만들기에 비유하자면 문켄 폴라 러프(0)에 라미네이팅 같은 걸 하지 않은 벽을 구현했다.
영업부장님은 유통 과정 중 책이 손상된다며 반대, 제작 담당자는 제본 작업 중에 이미 오염이 많이 될 거라고 우려할 상황. 책 하나 만들 때도 말 많고 탈이 나는데 집 만들기는 오죽할까. 자수성가한 친구가 건물 하나를 올리려다 중단하고 1년째 하고 있는 일은 소송과 ‘건축지옥’이라는 책의 기획이다. 다행히 나는 집을 고쳤을 뿐이고 사연이야 없지 않지만 어쨌든 고쳤다.

필기감이 좋은 우리 집 하얀 벽지 위에는 이런 메모가 하나 적혀 있다. 다음부터 쉬는 날에 일기를 쓰겠습니다. 제인(12세, 여)의 일기 숙제 마감일은 매주 화요일이다. 제인이는 책상 앞에 앉기와 첫줄 쓰기가 관건인 많은 대작가들과 다를 바 없다. 하얀 벽지 위의 다짐은 일요일 저녁부터 시도되어 월요일 밤에 이르러야 지켜지기도 했다.
구상과 착수에 1박2일이 걸린 아이의 일기엔, 그러나 좀 부족한 면이 있다. 나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요즘 아이들도 일기에 느낀 점을 쓰라는 지도를 받는다. 제인이 선생님께서도 빨간색 글자로 ‘느낀 점 부족’ 현상을 지적해 주셨다.
일기에 느낀 점이 있어야 한다면 일기는 신문의 사건사고 기사와 같아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사설도 아닐 것이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올바른 일기의 스타일은 수필일 것이다. 따를 수, 붓 필. 붓 가는 대로 따라가며 쓰는 자유로운 글.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도 ‘인연’ (1) 이라는 수필집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물론 그게 다라고 하실 리 없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 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이야, 차에서 풍기는 꽃향기 같은 글, 너무 진하지는 않게 써 다오. 초등학생에게는 좀 어려운 주문이다.
카톡, 트위터, 인스타그램. 거기서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많이 읽고 쓴다. 그 사람들이 출판시장에 들어와 독자도 되고 작가도 된다. 지난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0 중 6이 에세이였고 최근 3년간 시/에세이 장르는 연속해 두자릿수 성장세를 기록했다. 내가 매일 농구할 때 NBA를 가장 자주 보았던 것처럼.
연재노동자 이슬아(2)는 싸이월드에서 처음으로 ‘남들 보라고 쓴 일기’라는 장르를 학습했다고 한다. “다들 인터넷 안에서 혼잣말을 할 때 어떤 포즈를 취할지 소심하게 연구 중인 것 같았다.”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은 독백”이라고 하셨다.
수필로 시작해서 르포가 되려 한 이 글은 망했다. 사실은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을 바탕으로 당신의 수필론이 지금 보기에 얼마나 고루한지 좀 골려 보려고 시작한 글이다. 수필집에 실려 있는 ‘낙서’라는 수필은 낙서에 대해 흥미로운 설을 풀었나 보니, 그게 아니라 그냥 낙서처럼 아무 말이나 했다는 뜻이다. ‘은전 한닢’은 김동식(3)이나 피츠제럴드(4) 단편처럼 여운이 있다. 손 가는 대로 넘겨 보다 어느덧 피천득 선생에게 빠져들어 책의 처음으로 돌아와 읽어 본 ‘서문’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나의 이 조약돌과 조가비 들을 ‘산호와 진주’라고 부르련다.” 아, 보노보노, 아니 선생님 사랑합니다.
(0) 문켄 폴라 러프: 인쇄용 종이의 한 종류. 딱히 알 필요는 없다.
(1) 인연: 피천득 수필집, 피천득, 민음사 개정판 2018년, 초판 1996년 출간
(2) 이슬아: 연재노동자, '일간 이슬아' 발행인, <일간 이슬아 수필집>등을 썼다.
(3) 김동식: 소설가. <회색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등 소설집이 있다
(4) F.스콧 피츠제럴드(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미국의 소설가. <위대한 개츠비> 등 대표작이 있다.
글. 에디터 조빔
출판편집자. HB 프레스를 운영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정직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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