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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안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해서 나도 “여보세요?” 했다. 그랬더니 지금 “통화 괜찮니?” 하고 물어온다.


아, 난감한 순간이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겠다. 친근한 말투로 보아 나를 잘 아는 사람 같은데……. 반말하는 걸 보니 선배인가? 어, 어, 머뭇거리다가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S였다. S는 대학 때 알게 된 ‘남사친’으로, 졸업하고도 종종 어울려 놀았다. 결혼한 뒤에는 가뭄에 콩 나듯 배우자와 함께 만나다가 아이를 가지면서 영 소원해져버렸다. S 부부는 딩크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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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S가 거의 5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으니 당연히 반가웠다. 목소리가 변해서 몰랐다고, 휴대폰을 잃어버려 전화번호도 사라졌다고,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냐? 흐하하. 난 바로 알겠던데.” S의 웃음소리를 듣자 낯설게 들렸던 목소리의 이질감이 한숨에 날아갔다. 진짜 S가 맞구나. 그래, S는 이렇게 웃었지. 안 웃어도 되는데 순둥순둥한 얼굴로 잘 웃어줬지. S는 자기 휴대폰에 은정이란 이름이 세 명 저장돼 있어 헷갈렸지만 한번에 연결됐다면 뿌듯해했다. “하이구나 고맙네. 큭큭.” 그렇게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 까불까불하다가 실토했다. 사실은 네 전화번호 지웠다고. 왜 지웠는지 물어봐주길 바랬는데 S는 도리어 미안하다고 했다. 사는 게 바빠서, 일에 치이다 보니, 사람들 안 만난 지 오래됐고, 술도 거의 안 마시고……뭐 그런저런 이야기. 한마디로 그동안 연락 못한 걸 서운해 하지 말란 소리였다. 그래서 그냥 얘기해줬다. 번호를 왜 지우게 됐는지. J가 세상을 떠났어. “J가 어디로 떠났다고? 어딜 갔는데?” 세상을 떠났다고. “죽었다고?” 그리고 침묵. “어쩌다가?” 그렇게 J의 소식을 뒤늦게 전했다. 장례식 때는 연락을 못 하고, 아니 안 했고…… 내가 상태가 아주 안 좋던 어느 밤에 술에 취해서는, J를 알지만 소식을 못 전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는데…… 줄줄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결국엔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화를 했다고. (그 죄 없는 동창을 붙들고 엉엉 울었단 말은 안 했다.) 그때 홧(술)김에 전화를 받지 않은 사람들 번호를 몽땅 지워버렸단다. 그 말을 하고 나니 뭔가 숙제를 끝낸 기분이 들어 비로소 S의 안부를 물었다. “간농양 때문에 두 달째 입원 중이야. 수술했는데 한쪽 눈이 안 보이네. 수술실 들어가기 전엔 멀쩡했는데 말이지.” 그런 얘기를 웃으면서 한다. 당황해서 (S도 아는) 내 주변의 아팠던 사람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그게 무슨 위로라도 될 것처럼. 끝으로 C는 뇌출혈 수술을 받았는데 고유명사를 다 잊어버렸어, 라고 했더니 S가 또 웃는다. “나도 그렇게 될지 몰라. 농양이 뇌에도 생겼대. 이틀 후에 또 수술이야.” 어쩌겠는가. 나 역시 웃으며 수술 잘 받아라, 말할 수밖에. 그런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불운을 말할 때 울지 않는구나. 웃는구나. 나이를 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S가 깜박 잊었다는 듯 물었다. “넌 잘 지내지?” 나도 웃으며 대답해줬다. “응. 숨은 쉬고 살아.” 전화를 끊고, 읽던 소설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엄청나게 웃기며, 철학적이고 신랄한 유머와 지혜로 가득하단 카피를 보고 샀는데 재미가 없다. 계속 읽어야 할까? 덮고 다른 책으로 넘어갈까? 반절이나 읽었는데 좀 아깝단 생각도. 하지만 나머지 부분도 계속 이렇겠지? 지루하고 도통 뭐가 좋은지 모르겠고……. 그러니 그만 읽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드는데 책장을 덮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머러스하고 신랄하고 지혜롭기까지 하군. 인생이랑 닮았잖아. 그렇게 금요일의 오후가 저물어갔다.

소설가 권은정 👉 소설가. 칼럼니스트. 다양한 글쓰기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당분간은 잠수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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