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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얼 이즈 더 토일렛?

일 년 전, 둘째시누가 경비를 몽땅 댈 테니 스페인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당연히 “콜!”을 외쳤다. 공짜라는데, 하물며 유럽이라는데, “전 안 갈래요.” 하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내심 ‘진짜 갈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패키지도 호텔팩도 아닌 보름간의 자유여행을 누가 준비한단 말인가. 일찌감치 둘째시누는 자긴 돈만 댄다고 선언한 터였다. 모든 준비는 나와 첫째 시누의 아들인 찐군이 맡아서 하라는데 어라, 이거 가능할까 싶었다. 우선 나는, 남들이 하루를 24시간으로 살 때 혼자 12시간으로 사는, 하는 거 없이 바쁜 한량이다. 계획이란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한 수양쯤으로 여긴다. 하도 귀찮은 게 많아 ‘숨 쉬는 건 안 귀찮냐’는 조롱을 듣기도 한다. (가끔은 진짜 그렇다.) 내가 그런 처지이니 남은 사람은 찐군인데, 흠, 이쪽 역시 사정이 녹록치 않다. 스물여섯에 군 제대 후 2년째 칩거중이시다. 둘째시누가 스페인여행을 제안했을 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동행할지 안 할지 그것조차 모르는 상태. 그리고 나머지 두 여행 멤버는 미성년자이니 열외. 게다가 둘째시누가 말한 여행 날짜는 자그마치 일 년 후. 작년 이맘때엔 너무나 까마득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속으로 ‘뭐, 진짜 가겠어?’ 하고 속 편히 있었다. 9월에 찐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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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모, 항공권 예매하게 여권 사본 좀 보내주세요.” 어? 어어? 아, 진짜 가는구나! 그러자 모든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선 여행 멤버의 면면을 살펴보자. 쿨하지만 까칠한 비혼주의자 둘째시누, 스물여덟 살의 히키코모리 시조카 찐군, 늦둥이 응석받이 열네 살 시조카 양양, 세 살 때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뛰어내리려고 난동을 부린 전적이 있는 아홉 살 아들 김윤, 그리고 삼만오백칠십팔 개의 걱정거리를 늘 이고 사는 나. 우리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요? 부랴부랴 가이드북을 사서 읽고, 유럽여행 관련 카페에 가입하고, 스페인여행 유튜브도 찾아보았다. 물론 게으르게. 열심히 여행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좀 바빴다. 진짜다. 남들은 하루가 24시간인데 나는 12시간이니 얼마나 바쁘겠나. 그렇게 여행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그러나 삼만오백칠십팔 개의 걱정거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 개가 늘었다. 스페인은 소매치기가 그렇게 극성이라는 거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자유여행의 유일한 가이드인 스마트폰을 도둑맞으면? 내 것만 조심해서도 안 된다. 우리 물주님이신 둘째시누의 지갑, 항공 숙박 등의 바우처를 내려받은 찐군의 스마트폰 역시 걱정됐다. 거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스페인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황은 심각하지 않았다. 스무 명이 조금 넘는 확진자가 나왔을 뿐이고, 정부의 대처 또한 순조로웠다. 걱정됐던 건 인종차별. 외형상 중국인과 쉽사리 구분이 안 되는 한국인들이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 그런데 이 모든 걱정은 쓰잘데기 없었다. 우려했던 멤버들의 면면은 나의 얄팍한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소매치기나 인종차별은 보지도 겪지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은 따로 있었으니, 먹으면 싸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 아이들 방광은 용량이 작다는 것. 그래서 내가 스페인에서 가장 많이 한 영어는 “웨얼 이즈 더 토일렛?”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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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첫 목적지였던 바르셀로나 길거리 한복판에서 김윤이 “엄마, 나 쉬마려.” 했을 때 첫 멘붕이 왔다. 스페인의 역사, 스페인의 물가, 스페인의 교통, 스페인의 행정구역, 스페인의 식당 문화…… 등등은 알아봤으면서 왜 화장실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두리번두리번 공중화장실처럼 생긴 걸 찾아보았다. 하지만 압구정동 한복판에서 공중화장실을 찾는 것과 비슷했다. 아무데나 들어가서 화장실 좀 사용하겠다고 부탁해볼까. 한국에서도 못하는 말을 스페인에서 할 수 있을 리가! 그때 메트로 표지판을 지나쳤던 게 기억났다. 가자, 전철역으로! 김윤의 손목을 부여잡고 역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못 찾겠다. 역무원으로 짐작되는 한 여성을 붙잡고 물었다. “웨얼 이즈 더 토일렛?” 뭐라뭐라 하시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용케 ‘더즌 해브’와 ‘쏘리’는 알아들었다. 없다고? 다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나중에 알아본 바, 스페인 전철역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김윤이 징징거리며 하소연했다. “엄마, 나 한 방울 쌌어.” 녀석아, 엄마 눈에도 한 방울 나올 것 같다. 그때 사그라다 파말리아 대성당의 스테인글라스 빛처럼 영롱한 아우라가 번지던 건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영광스러운 버거킹이렸다! 그리하여 우리 모자가 스페인에서 가장 많이 들락거린 곳은 버거킹, 맥도날드, KFC 등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소싯적 패스트푸드를 반대하는 어린이 교양서를 쓴 사실이 송구스러울 만큼 그들 덕을 톡톡히 보았다.) 보름의 여정 동안 화장실 에피소드는 쭉 이어졌다. 패스트푸드점이 안 보여 30분 전에 식사했던 식당으로 영수증을 들고 찾아가 화장실을 이용한 적도 있고, 인적 없는 곳에서 도저히 화장실을 못 찾아 생수통을 이용한 적도 두어 번 된다. 아들 녀석의 용변 문제는 이번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플라멩코 공연을 보다가도 화장실을 찾기 위해 일어서야 했고, 마드리드의 티센 미술관에서는 드가의 ‘푸른 옷의 발레리나’ 대신 화장실을 찾아 뱅글뱅글 돌아야 했다. 세비야에서 황금의 탑을 올랐을 때 역시 아들은 급작스럽게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다가 다시 헉헉대며 내려갔다. “웨얼 이즈 더 토일렛?” 고개를 살래살래. 하긴, 천팔백 년 전에 세워진 좁다란 면적의 탑에 화장실이 있을 리가. 눈물을 머금고 나가려고 했더니 아들이 말한다. “엄마, 푯값 아깝다. 참을 수 있으니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나가자.” 짜슥아! 그런 얘기는 아까 내려오기 전에 말했어야지! 욱신거리는 고뱅이(무릎)를 주무르며 후다닥 탑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렇게 우리의 스페인 (화장실) 투어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지난 십 년을 통틀어 가장 멋진 경험이라 할 만큼 스페인은 (화장실 문제 빼고) 아름다웠다.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 지긋지긋한 “웨얼 이즈 더 토일렛?”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을 떠나기 전날 오후.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마트를 가는데 한 걸인이 눈에 띄었다. 거리의 예술가, 걸인, 분수대를 볼 때마다 동전을 달라고 조르는 김윤에게 이번에도 동전 두 개를 건넸다. 그때 걸인이 뭉그적대며 일어섰다. “어? 퇴근하나 보다.” 웃으며 동전을 도로 가져가려는 찰나, 걸인이 모퉁이를 돌아 벽에 바싹 붙더니 바지춤을 끌렀다. 오줌줄기가 벽을 타고 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질겁해서 김윤을 붙잡았다. 그러나 김윤은 나의 만류를 물리치고 동전 두 개를 살포시 놓아두고 돌아왔다. 그 광경은 지금도 어떤 서글픔처럼 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에서 주인공은 거리에서 똥 누는 남자를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침대에 누워서도 그녀는 잠이 들지 못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 어둠 속 남자를 생각한다. 이제 자기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거리에 나앉을 거라는 생각. 이 누추한 원룸조차 떠나야 하고 동물처럼 거리에서 똥을 누게 될 거라는 생각.” 제아무리 슬프거나 화가 나 식욕을 잃었어도 결국엔 다시금 배가 고파온다는 것. 그 음식들이 너무나 맛있다는 것. 그때 느끼는 모욕감과 비감처럼 배변 역시 우리 삶의 본질과 불현듯 조우하도록 할 때가 있다. 어느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인간이라도 ‘그것’을 참을 수는 없다. 옷을 더럽히든 그 옷을 끌어내리든, 우리는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이 보름 동안 하지 않은 화장실 청소를 했다. 물때 끼지 않은 깨끗한 화장실을 두 개나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소설가 권은정 👉 소설가, 칼럼니스트. 아들을 하나 기르고 있는데 매우 천천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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