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개츠비
- 퐁당 에디터
- 2021년 1월 4일
- 2분 분량
주인공 ‘닉’의 집에 ‘개츠비’가 찾아 왔다. 온갖 소문과 과장에 뒤덮인 자신의 배경을 ‘닉’에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개츠비의 태도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들뜬 데가 있다. 지난 수요일까지 집어들었던 소설(위대한 개츠비)은 여기까지 진행되었다. 목요일에는 답해야 할 메일과 진행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종이 조각을 읽던 페이지에 끼워넣고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할 때, 일하다 말고 중간에 커피를 한잔 마실 때, 나 몰래 닉과 개츠비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했다. 언뜻 닉의 사촌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다음 페이지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자연스럽게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사실 이십 대 때 읽었던 소설이라 큰 줄거리는 기억이 나지만, 다시 읽어보니 새롭다.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도 있어서 나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중이다. 나는 개츠비가 무자비하게 땅을 빼앗아 부를 축적한 석유왕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용이나 암시는 없없다. 위대한 개츠비랑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기억 속에 뒤섞여 있다. 개츠비의 짝이었던 데이지가 발레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것도 역시 소설의 내용과는 영 거리가 멀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랑 내 맘대로 교차 편집한 것 같다.

아무래도 시각적인 자극은 힘이 세다. 종이 위에 적혀 있는 텍스트는 상상력의 버튼을 누르지만,그 상상의 공간 속으로 온갖 다른 맥락들이 별 어려움없이 스며든다.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아직 소설의 1/3 정도 밖에 읽지 못했지만, 내 머릿 속에서 써내려간 이야기는 그 다섯 배는 되는 것 같다. 다 읽은 소설보다 읽다만 소설이 훨씬 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도무지 다음 페이지를 들출 시간이 나지 않는다. 바닥에 머리를 대면 잠드느라 위대한 개츠비는 하염없이 닉과 개인사를 설명한다. 소설책은 며칠째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고양이처럼 엎드려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일이 늘어지고 있는 탓이다.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행사는 취소되거나 지연되고, 제약은 더 많아졌다. 금요일까지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토요일 점심에 깨끗하게 사라지고, 취재처 1층 카페에 확진자가 나와서 기약없이 인터뷰가 미뤄지기도 한다. 예정된 행사는 열렸는데 어쩔 수 없이 관객은 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이 없는 원고, 영상이 없는 자막, 사람이 나오지 않는 인터뷰.
어쩔 수 없다. 누구 탓할 사람도 없다. 상상력과 기획으로 이런 공백들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그 맥락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마른 걸레에서 물을 쥐어짜내는 기분이 든다. 요즘 느끼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현장, 현실이야말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촉매라는 것이다.
전에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기획이나 상상력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구구절한 사람들의 사연과 현실적인 제약들이 외려 상상력을 자극하는 버튼이 된다. 흔히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는 식의 말들을 많이 하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한참 앞질러나가는 현실을 간신히 상상력의 힘으로 포착하는 것에 가깝다. 코로나 시대의 눈으로 개츠비를 다시 바라보면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냉담한 현실에 자신의 야망과 전망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의 눈으로 개츠비의 파티를 보면서 등장 인물마다 마스크를 씌워본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어울리고 자신을 알리는 데 여념이 없는 개츠비는 슈퍼전파자 1순위 후보다. 코로나 때문에 나도, 개츠비도 힘들다.
에디터 김선형 👉 온오프라인 미디어를 운영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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