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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의 안녕

친구들은 그를 유니콘이라고 불렀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듣기만 했을 뿐, 누구도 목격한 적은 없는 신비로운 존재. 듣고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한동안 내 연애는 친구들에게 판타지였다.


그와 사귀기 시작할 무렵, 퇴근 후 켜는 드라마마다 온통 사랑 이야기였다. 오해영은 죽음이 예정된 남자에게로 달려갔고(<또! 오해영>), 강모연은 불쑥 위험한 곳에 다녀와야 하는 남자에게 반해버렸다(<태양의 후예>). 완벽하게 멋지지만, 같이 있을 수 없거나 같이 있으면 안 되는 남자에게 빠져들기 전 마음을 다지는 그녀들에게 속삭였더랬다. 그 마음을 거부하는 걸 거부해. 어차피 거부할 수 없거든.

내 말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오해영과 강모연은 사랑을 선택했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상황이 달라졌다. 죽을 줄 알았던 남자가 계속 살아있었고, 죽었다고 알려졌던 남자도 살아있었다. 드라마 종방이 가까워지자 친구들이 말했다. “결국 또 다 판타지였어.” “연애 드라마는 원래 판타지야. 30대 중반 넘어 배도 안 나오고 머리숱도 멀쩡한데 말까지 통하는 남자랑 연애한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잖아.”

친구들과 오래 사귀어서 아는데, 근거 충만한 단정이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친구들의 지론에 몇 마디 더했을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은 배도 안 나오고 머리숱도 멀쩡한데 말까지 통하는 40대 남자와 사귄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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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9천Km나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지. 눈에 안 보이잖아, 역시 연애는 판타지야, 라고 했다. 데려와 보여줄 수 없으므로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조금 서러웠다. 친구보다 드라마 주인공을 더 가깝게 느끼는 내가 좀 낯설었다.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그가 오해영이나 강모연의 남자만큼 극적이지 않아서, 죽었다 살아 돌아오는 뻔한 판타지가 아니어서. 오해영과 강모연의 사랑을 뻔하다고 해서 그녀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 내가 물었다.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게 뭐에요?” 그가 내게 되묻는다면 난 꼰대가 될까 봐 두렵다고 답할 작정이었다. 그는 내게 되묻지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말라리아에 걸리는 거요.” 사귀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알았는데, 그는 이미 말라리아를 앓았다. 말라리아에 걸리고도 살이 3Kg 밖에 안 빠졌다며, 보기 드문 강철 체력이라고 으스댔다. 그게 더 슬펐다. 나는 독감에 걸려 며칠 밤을 고열에 시달렸어도 체중은 1Kg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우리가 아직 서로를 알지 못하던 어느 시간에 혼자 호되게 앓았을 그를 떠올리면, 오해영과 강모연을 데려다 앉혀놓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기처럼 말라리아도 한 번 걸렸다고 해서 다음엔 무사하리라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우기만 되면 나는 모기가 가장 두렵다. 내가 볼 수도 없는 곳에서 어느 눈 밝은 모기가 그를 물까 봐. 이곳에는 드디어 봄이 왔는데, 그곳은 우기가 깊어지는 중이다. 여기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코로나19가 여전히 퍼지고 있다. 대책도 없는 질병이 커질수록 혐오도 커진다. 코로나19는 중국에서 시작됐고, 그가 있는 나라의 첫 번째 코로나19 확진자는 일본인이었다. 고로 코로나19는 동양인, 그는 그 동네의 유일한 동양인이다. 주말마다 먹거리를 사러 읍내로 나가던 일마저 이젠 이웃들에게 부탁한다고 했다. 해외의 자원봉사자들을 철수시킨 이유가 감염 위험보다 동양인 혐오가 더 컸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오랜만에 다시 서러웠다. 그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오해영이나 강모연처럼 달려갈 수도 없었다. 그곳과 여기를 잇던 비행 편도 잠정 중단되었다. 하필 이런 때 내 연애를 부추겼던, 8년 롱디 끝에 결혼한 친구는 남편과 함께 페루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단다. 나는 볼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그는 정말 안녕한 걸까?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믿을 수밖에 없다. 믿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불안은 관계를 잠식한다. 롱디에서 보이지 않는 일상에 대한 믿음은 필수이다. 내겐 보이지 않는 곳, 나는 볼 수 없는 곳에서도 괜찮을거라 믿어야 한다. 그러니 이 연애는 사실 판타지가 맞는지도 모른다. 판타지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믿고 싶을만한 그럴싸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사실 나는 온 세상이 안녕한 판타지를 꿈꾼다. 작은 방 안에, 삼시 세끼를 차려야 하는 집 안에, 여전히 사무실에, 어쩌면 병원에, 길 위에, 약국 안팎에, 홀로 마주한 식탁 앞에 머무는 모든 분이 안녕하기를 마음을 다해 기원한다. 내가 모르는 곳, 가 본 적 없는 곳, 볼 수 없는 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모두 안녕하면 좋겠다. 그렇게 온 세상이 안녕하다면, 동쪽으로 9천Km 떨어진 곳에 있는 내 사랑과 서쪽으로 1만1천Km 거리에 사는 동생 내외와 서남쪽으로 1만7천Km 먼 곳에 있는 친구 부부도 모두 안녕하다고 믿을 수 있을 테니.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안녕하세요’란 뻔한 말에 온 마음을 담는다.

에디터 이명제 👉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다가, 아프리카에 숨어 있던 인연을 만나 사귀는 중이다. 목격자가 없어서 혹시 알리바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연애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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