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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빔대백과사전_원고지 편


링링? 밍밍? 다행이 태풍은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가 지금은 이름도 희미해졌다. [1] 주변에 안부를 물어보니 부러져 쓰러진 가로수를 보았다는 사람이 둘이었다. 나는 버드나무였냐고 물어보았다. [2]

버드나무는 잘 부러지나 보다. 왠지 그럴 것 같다. 스스로를 끊어내 번식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니 말이다.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것은 민들레가 씨를 바람에 날리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강처럼 흐르는 물가에 우뚝 서있다기보다 물을 향해 축 늘어진 모습으로 있다가 바람 때문인 것처럼 가지를 툭 부러뜨린다. 예를 들어 태백시 상사미동의 디디기벌 인근에서 부러진 버드나무 가지가 한강을 따라 흘러 흘러 마포구 당인동 밤섬에 다다르는 300킬로미터 여행에 성공했다고 치자. 밤섬에 뿌리내린 버드나무는 디디기벌 버전과 유전적으로 완벽히 똑같은 나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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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위에 글 쓰기는 김훈 작가에게 버드나무가 물가에서 가지를 부러뜨리듯 당연한 일일까? 왜 우리는 어떤 글을 원고라고 부를까? 실제로 원고지에 글을 쓰는 사람은 김훈 작가를 빼면 초등 1, 2학년 아이들밖에 없을 텐데도. 원고지라는 물건이 생겨난 때로 돌아가보자. 4차산업혁명을 말하기 위해 250만 년 전 수렵채집시대로 돌아간 유발 하라리처럼.

원고지는 1800년대 일본에서 처음 고안되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1819년에 출간된 고문서 총서인 <군서유종>이 있다. 이 책의 편찬시 20x20행의 400자 원고지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격자가 있는 원고지에 쓴 글은 인쇄 제작공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편집자는 글의 분량을 정확히 측정해 실제 만들어질 책의 볼륨을 예상할 수 있었고 목판 인쇄공들은 원고지를 보고 정확히 판을 깎아 작업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원고지는 대량 인쇄시스템의 밑작업으로써 일본 출판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20세기 초 조선으로도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 첫 기록은 유길준이 일본 망명기(1897~1904)에 집필한 국어 문법서 <조선문전>인데, 실제 출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400자 원고지에 쓴 초고가 남아 있다. 1910년경에는 조선에 설립된 인쇄소에서 전용 원고지를 만들어 사전과 잡지 편찬 작업에 본격적으로 활용한 기록들이 나온다.

원고지 위에 쓴 글은 달랐다. 이제 글에도 값이 매겨졌다. 원고료였다. 이제까지 시를 짓거나 편지, 일기를 써서 누군가에게 돈을 받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불법 복제본 때문에 인세가 줄어 걱정이었지만 교산 허균은 ‘홍길동전’으로 한푼도 벌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어머니에게 쓴 편지였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띄어쓰기 교육을 위해 원고지의 격자 형식을 활용한다. 아이들은 받아쓰기 시험을 원고지 노트 위에서 매주 치른다. 20세기 초반 일본에서 원고지 제작업자와 공교육이 기획한 일이 1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현장이랄까. 유지원은 <글자풍경>에서 초등학생들의 원고지 공책이 논리적이지도 않고 알아보기도 힘들다며 개선책을 제안했다. 정방형 사각형을 반으로 나눠 직사각형 비율로 바꿔 두칸에 한 글자를 쓰고, 띄어쓰기는 한칸만으로 하자는 것이다. (글로 써놓으니 번잡해 보입니다만, 상당히 깔끔한 아이디어입니다.) [4] 원고지는 한중일에서만 썼다고 한다. 왠지 그랬을 것 같긴 한데, 서양이나 다른 언어권에서도 활자 인쇄를 할 때 원고지 같은 걸 썼다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의문에 관한 추적은 다른 분께 부탁을 드릴까 한다. 1. 내 기억이 희미해진 것은 뇌 표면에 주름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를 입은 분들의 빠른 재기를 기원합니다.

2. 둘 다 버드나무였다.

3. 이 이야기는 호프 자런 박사의 자서전 <랩 걸>(알마, 2017)에 미네소타 버전의 오리지널이 있다. 솔직히 한강 버전은 거리상 심하게 과장되었음을 밝힌다.

4. 유지원의 <글자풍경>(을유문화사, 2019)에서 그림을 찾아보세요.


에디터 조빔 👉 출판사 HB 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정직하게 보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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