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말걸기
- 퐁당 에디터
- 2019년 11월 8일
- 4분 분량
타인, 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곳에 살면서 누군가와 소통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일생일대의 중요한 경험일 것이다. 말을 주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정신분석 전공자인 내게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그 소통이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를 물어보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깊은 생각과 내밀한 감정들에 대한 것이라면? 언어와 이해, 소통과 관련해서 뉴욕에서 개인적으로 겪었던 몇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처럼 정신분석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직접 카우치에 누워서 회기당 보통 45분씩, 최소 주 4회 이상의 분석 상담을 받게 된다. 내 분석가는 80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다소 곱상하고 소위 어떤 ‘포스’가 느껴지는 할머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한국에서 영어를 배운 내게, 뉴욕에서, 그것도 영어로 상담을 받는 경험은 사람 사이의 소통과 이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질문들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과연 내 얘기가 잘 전달이 될까, 내 말을 잘 이해할까 하는 의구심이 자주 떠올랐는데, 그와 조금 다른 차원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의 시작은 상담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뭘 설명하려고 했었는지 지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는 머리 속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 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우리 말에서 흔히 쓰는 “썰물 빠지듯”이라는 표현을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어쨌든 그러다 갑자기 이 할머니가 “How poetic! (오 시적이야!)”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이 일이 있기 몇 주 전 뉴욕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있던 선배가 자신의 분석가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거의 똑 같은 경험을 나에게 얘기했던 터라 더 신기하기도 했다. 그 선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경험을 내게 말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왠지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었기 때문에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을 굳이 얘기해서 선배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났었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일이었다. 이후로 꽤 오랫동안 이 문제는 나의 탐구 대상이 되었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대부분은 일종의 메타포(여기에서 메타포는 좀더 넓은 의미로, 환유나 직유까지를 모두 포함한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상 언어에서 이들 메타포의 거의 대부분은 ‘죽은 은유’라는 것이다. 내 경우에서처럼 ‘밀물처럼’, ‘썰물처럼’도 그렇지만, ‘잘 나간다’, ‘위로 올라간다(승진)’, ‘물 먹었다’ 등등 우리 일상에서 메타포적인 표현이 아닌 것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힘들 정도다.
그런데 내가 뉴욕에서 발견한 것은 이러한 일상 언어에서의 메타포가 언어권마다 일정 부분 공통되기도 하고, 어느 한 언어권에서 많이 쓰이는 메타포가 타언어권에서는 전혀 없어가 잘 쓰이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특정 언어권에서 사용되는 죽은 메타포가 타언어권에서는 생생한 시적 분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셈이다. 이는 농담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이어서, 당신이 외국에 살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훌륭한 언어의 마술사나 썰렁한 소위 ‘아재 개그’ 몇마디로도 천재적인 유머감각의 소유자라는 말을 들을 기회가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역시나 소통과 상호 이해에 있어서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다시 내 경험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카우치에 누워서(이때 분석가는 내 머리맡 쪽 의자에 앉아 있어서 내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 손짓 발짓에 괴발개발 설명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말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특히 대부분의 말에 ‘으흠~으흠~’하고 추임새를 넣던 이 할매가 그런 맞장구 없이 침묵할 때는 더 그렇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Are you following? (알아듣고 있나요?)”이라고 묻곤 하는데, 십중팔구 대답은 “Yes, of course”이고, 가끔은 거기에 덧붙여 “네가 말하는 그 경험이 어떤 식이었는지 좀더 잘 이해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야.”라는 말이 이어지고 나면 안심하고 다시 말을 이어가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대답을 듣고도 정말 제대로 이해했는지 찜찜한 마음이 계속 남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마디 말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또 설명을 요구하고, 역시나 그 설명이 제대로 소통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설명을 계속 요구해야 한다면 이는 무한 소급의 막다른 정체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제대로 듣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내 개인적인 심리 역동과도 깊이 관련이 있는 문제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는 같은 모국어 사용권에서의 우리 상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같은 모국어 문화권에서 우리는 정말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많은 경우, 그렇다는 착각에 빠져서, 우리가 거대한 착각과 소통 오류의 어떤 구덩이에 같이 빠져있음에도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확인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지 않을까. 개인간의 수준에서도 그렇지만 사회나 정치, 문화, 세대간에 발생하는 숱한 오해와 겉도는 언어들의 문제도 어쩌면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타언어권의 존재가 거울로 작용했던 상당히 흥미로운 경우가 또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미국인 친구와 각국의 글자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글 얘기가 나왔다. 자기는 한글은 잘 모르는데, 글에 ‘circle’이 많은걸 보면 바로 한글이라는 걸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글에 ‘circle’이 많다는 사실은 태어나서 낼모레 50이 되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새로운 거울을 통한 발견은 그 자체로 대단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Really!” “Terrific!” “Wonderful!”을 외쳐댔는데(말이 짧아서 한 단어 감탄사들만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한글 문장만 보면 단어에 이응이 몇 개나 들어가는 지 매번 세어보는 버릇이 생겼음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단순히 언어 이해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타자의 언어와 문화가 내게 거울로 작용했던 적도 있었다. 뉴욕의 한 분석가와 어릴 때 입양된 한국인(A라 하자)과 한국의 입양 문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A는 사춘기때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입양한 부모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성인이 된 이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A의 부모가 어렸을 때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이에 대해 미국 분석가가 “Why?”라는 간단한 질문을 던졌는데, 나에게는 그 “Why?”라는 짧은 한마디가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A의 성장 과정에서는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일종의 트루먼쇼처럼 그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 어른들 모두는 A가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고 A만 그것을 모르는 상태가 십수년간 지속되었던 것이고, 한편 A가 그 비밀을 알고 나서 이번엔 반대로 A가 다른 가족들 모두를 속이게 된 셈이어서, 그 가족 내에서 이중의 비밀, 이중의 속임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이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A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이처럼 어떤 상황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아무 의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가 유지됐던 셈인데, ‘왜?’라는 외글자 한 단어가 그 이해에 대한 착각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는 영어 표현들에 대해 단어 하나하나의 직접적인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내 미국인 내담자 한명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다가 “Stop and smell the roses.”라는 문장을 말한 적이 있었다. 번역하자면, ‘너무 정신없이 살던 것을 잠시 멈추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거나 여유를 좀 가지라’는 뜻으로 일상에서 꽤 흔하게 쓰이는 표현인데, 저 문장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나에게는 말 그대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장미 향기를 맡으라’라는 뜻(물론 여유를 가지라는 의미가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으로 먼저 강하게 다가왔다. 일상에 정신 없고 지칠 때 나는 종종 그 말을 떠올리면서 의식적으로라도 한 템포의 여유를 가지곤 한다.
Stop and smell the roses! 당신들도 그러길 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은호
👉 오랫동안 정신분석을 공부해오고 있으며,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2016년 여름부터는 뉴욕에서 정신분석 공부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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