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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것

4년 전 어느 겨울날, 느닷없이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검고 작고 다리가 짧은 강아지는 2개월 된 닥스훈트였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기에 나는 아연실색하였다. 쌔근쌔근 숨 쉬는 한 ‘생명’이 곁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였다. 눈이 얼굴의 반은 되는 듯이 크고 덕지덕지 낀 눈곱과 거칠한 털, 죽도 못 얻어먹은 듯 바싹 마른 몸이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꼬리는 또 어찌나 길고 팔랑대는지. 한마디로 ‘어좁이에 얼큰이’ 스타일이었달까.


그동안 우리 집엔 여러 생물이 살았었다. 햄스터나 거북이, 품종을 알 수 없는 잡종견 일명 ‘똥강아지’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들이 입양한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햄스터. 각기 다른 엄마에게서 왔다는 햄스터는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구석으로 자주 몰았다. 약한 놈이 우리를 탈출해서 집구석 어딘가에 숨어 지냈는데, 그 작은 생물이 어딘지 징그럽고 비위생적이란 생각에 그것을 우리에 잡아넣고 안도하곤 했다. 하루는 한 놈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일전에 그것이 필사의 탈출을 한 것을, 나는 죽으라고 우리에 넣은 꼴이 되었다. 비참한 죽음을 눈으로 보고서야, 그 녀석이 밤마다 비명을 질러댄 것이 생각났다. 무지함은 죄다.


#거북이. 녀석은 함께 지낸 지 수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스스로 탈출했다. 집안 곳곳 뒤져보긴 했는데 도통 찾을 수 없었다. 이삿날을 앞두고 짐을 정리하던 어느 날 수개월 만에 그 녀석을 발견했다. 물도 없이 먹이도 없이 어찌 생존할 수 있었을까. 불로장생 같은 거북이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똥강아지. 아주 오래전에는 강아지와 잠시 동거한 적도 있다. 길을 잃은 아이나 노인에게 집을 찾아주는 일이 잦았던 아버지가 받아온 ‘선물(?)’이었다. 대여섯 살 된 자식들이 좋아할 것이 생각나서 아버지는 점퍼 안쪽에 태어난 지 한 달여 된 강아지를 품고 왔다. 엄마는 어디서 똥강아지를 주워왔느냐며 펄펄 뛰었는데, 먼지 하나 없이 집안을 관리하던 어머니의 성격상 ‘출처 불명의 강아지=세균’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야 말았다. 어느 새벽 강아지는 마구 토를 하더니, 화장실 한편에 이상한 변을 보았단다. 자세히 보니 눈에 뵈는 기생충이 변 덩어리와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차마 치우지 못하고 바가지로 덮어놓은 채 밤새 그 앞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아버지가 일어나자 당장 저 강아지를 버리지 않으면 이혼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날로 우리 집에 강아지란 녀석은 다시 발붙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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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0여 년 후, 안방 담요 위에서 쌕쌕 숨 쉬는 닥스훈트를 보게 된 것이다. 친구와 1박 2일 짧은 부산 여행을 하고 돌아와 보니 남편과 아이들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강아지를 입양해 놓은 것.


강아지는 아무 데나 쉬를 하고, 나무 의자를 갉았다. 짧고 검은 털은 이불과 베개, 심지어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콕콕 박혔다. 밤에는 배가 고픈 건지 놀고 싶은 건지 허공에 대고 헛짖음을 하는데 말릴 길이 없었다.


한동안은 참 괴로워했다. 내 집 내 인생도 정리되지 않는 이 삶에 웬 새 생명이란 말인가. 이 친구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많이 했다. 소리를 지르며 간식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거나 등짝을 때려봐도 별 소용은 없었다. ‘개는 개일 뿐이구나’, 체념이 들 때 서너 달 된 강아지를 데리고 첫 산책이란 것을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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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이 익숙지 않은 녀석은 먼저 앞서며 속도도 방향도 그야말로 멋대로였다. 그러더니 점차 길가에 먼저 지나간 개들의 체취를 맡느라 열심이었다. 어찌나 집중하는지 그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강아지는 형님 개들이 먼저 일을 본 곳에 소변을 보고 공원 풀숲에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빙글빙글 원을 돌면서 대변을 보기도 했다. 사람이 아니라 동종인 개들의 체취를 맡고 행동을 모방하며 강아지는 점차 ‘강아지답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루 한 번의 산책으로도 집에서 변을 보는 일이 거의 사라졌고, 장난감을 가지고 10분 던지기 놀이를 해주자 헛짖음이나 신발 물어뜯기 등도 점차 줄었다. 이것뿐이 아니다. 외출을 하려 신발을 신으면 현관까지 쫓아와 눈을 크게 뜨고 꼬리를 흔드는 녀석. 산책이 유일한 낙인 녀석이 집안에 갇혀 있는 게 안타까워 "바이 바이" 손을 흔들며 간식을 주고 외출 후 돌아와서도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간식을 주었더니 이젠 집에 사람이 없더라도 짖거나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끼리의 사인 혹은 약속을, 이 녀석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이다. 물론 강아지와 함께 산다는 건 좀 손이 가는 일이다. 그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낄 때보다 확연히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왜 그런 불편한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모를 때가 더 많다. 불편하고 괴로워서 누가 대신 키워준다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서서히 강아지가 좋아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산책, 냄새 맡기, 강아지 친구와 인사하기 같은 것들. 이 녀석의 진지하고 열성적인 모습, 뭔가를 배워가고 느껴가는 모습이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내게 고통을 주려고 문제행동을 한 것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처럼 이빨이 나는 시기에는 뭐든 긁어대고 싶을 뿐이다. 계절이 변하면 털이 빠지는 것은 각질이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사람처럼 세포 활동을 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헛짖음이나 끙끙거림도 스트레스나 불안감 때문일 수 있다. 함께 경험을 공유해나가면, 녀석의 기분과 건강, 그리고 심지어 그 녀석이 하고 싶은 말까지도 짐작이 간다. 점점 이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이 녀석은 내가 싫다고 표현하는 것들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일을 하거나 쉬고 싶을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 오는 대신 담요 깔린 의자에 자신도 앉혀 달라고 조른다. 그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거나 널브러져 자면서, 내 일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일이 끝나고 나면, 벌떡 일어나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나를 쫓아다닌다. 기회를 틈타 옆에 앉아 있으려 한다. 옆에 있고 싶어 하는 것. 함께 하고 싶은 마음. 그게 전부다. 이 녀석에게는. 이 녀석의 이름은 ‘블랙’이다. 나는 블랙이와 함께 살고 있다.

프리랜서 작가 이현정 👉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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